바람과 바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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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호 10면

바람 드센 날, 바람이 더 드센 섬진강 변의 좁은 흙길을 바람 맞받아가며 걸었습니다. 모자 푹 눌러쓰고, 윗도리 깃 바짝 세우고, 더러 옷깃에 얼굴 돌려 숨겨가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습니다. 특별히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바람 불어 정신 사나운 날에 길을 걸으면 나름대로 재미있습니다. 이런 날은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더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람길 드센 곳을 헤쳐 가는 자신을 보게 되고, 생각하게 되고, 느끼게 됩니다.

PHOTO ESSAY 이창수의 지리산에 사는 즐거움

편안한 날, 편안한 길 걸을 때도 깊은 생각에 빠질 수 있지만 이처럼 정신 사나운 날의 걸음은 자신에 더 집중할 수 있습니다. 힘든 시간을 버텨내는 자신을 보는 겁니다. 흔들리는 세상에 흔들리는 나를 다잡으며 걷는 어느 순간,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우연히 마주치는 어느 순간에 발걸음이 멈출 때가 있습니다. 지금이 그렇습니다. 대밭 길 사이에 불현듯 나타난 바위가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모두 흔들리는 날에 홀로 꿋꿋한 바위.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닌 그냥 그런 모습에 무게감 ‘백배’를 느꼈습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을 그냥 멈추었습니다.


이창수씨는 16년간 ‘샘이깊은물’ ‘월간중앙’등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다. 2000년부터 경남 하동군 악양골에서 녹차와 매실과 감 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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