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판소리 뮤직 비디오 버전' 임권택의 〈춘향뎐〉

중앙일보

입력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있다. 임권택 감독의 신작인 〈춘향뎐〉도 그러한 이야기다. 열 여섯 살짜리 '아이들(요즘 관점으로 보자면)'이 첫 눈에 눈이 맞아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결국에는 그들의 사랑이 고난을 겪은 후 행복한 결과로 맺음한다는 이 이야기는 누구나 어려서부터 수도 없이 보고 듣고 했던 것이다.

한편 사람들은 누구나 이 이야기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다른 관점으로 해석해 보려는 시도들을 해왔다. 월매를 내러티브의 중심에 놓는다거나, 주변인물인 방자와 향단이 캐릭터를 부각시켜 희화화한 것, 혹은 춘향과 몽룡의 사랑이 해피 엔딩이 될 수 없다는 관점으로 접근해서 신분사회에 대한 비판성을 강화한 경우 등이 그런 사례들에 속한다.

그렇다면 임권택 감독이 신작 〈춘향뎐〉을 어떻게 만들었는가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한국 영화의 정신적인 버팀목이자 어른이며, 자존심과도 같은 존재인 그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인 〈춘향뎐〉을 영화로 만든다고 할 때는 그것은 단순히 한 감독이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는 것과는 존재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임권택 감독의 신작 〈춘향뎐〉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춘향전'과 다르지 않다. 자신의 관점을 개입시켜 새로운 것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없으며, 캐릭터나 내러티브는 사람들이 수 많은 책, 방송과 영화,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너무 원안에 충실해서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면 모를까...

그런데도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은 이전에 만들어졌던 '춘향전'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접근법(소재를 다루어 나가는 스타일)도 다르다. 임권택 감독이 보여 주려는 것은 캐릭터나 내러티브, 혹은 그것을 뒤집어 어떠한 혁신적인 관점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판소리'와 거기서 나오는 그 무엇이다.

이 영화에 대해 인쇄된 홍보물을 한 번이라도 보신 적이 있는 분들이라면 영화의 원안이라고 적혀 있고 거기에 '조상현 창본 춘향가'라는 말이 써져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왜 영화는 이것을 강조하고 전면에 내세우는가? 그것은 곧 이 영화에서 임권택 감독이 관객들에게 전달하려 한 것이 무엇인지와 깊은(매우!) 관련이 있다.

영화의 보도자료와 홍보용 리플릿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과거(99년 10월) 〈춘향뎐〉촬영현장인 남원 광한루에서 본 기자와 마주했을 때 임권택 감독은 이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동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누구나 다 안다고 생각한 〈춘향뎐〉을 내가 판소리로 듣고 느낀 감동과 멋, 그것은 전에 몰랐던 새로움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감동을 영상으로 전달하고 싶습니다."

당시 임 감독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잘 이해를 못하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굳이 쉽게 예를 들자면(이 말은 완전하게 정확한 표현은 아니라는 것이다)" 판소리를 사운드로 이용한 뮤직 비디오 같은 영화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1월 18일 공개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에서 확실히 판소리는 영화의 음악으로, 사운드로, 그리고 내러티브 그 자체로도 쓰이고 있었다. 이 판소리는 실제 조상현 명창의 춘향가 소리이며, 영화는 조상현 명창의 공연을 스크린에 옮겨 놓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영화는 조상현 명창의 공연이 진행되는 현재 시점에서 그 이야기 속으로 화면이 옮겨 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도입부에는 과제물 때문에 판소리 공연을 보러 온 대학생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모습은 이 영화를 보러 올 젊은 관객들에 대한 은유로 보여 흥미롭다. 따라서 이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조상현 명창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소극장 안의 분위기는 〈춘향뎐〉이 공개될 당시의 극장 풍경에 다름아니라는 생각마저 던져 주게 된다.

영화는 5시간을 넘기는 원판 '춘향가'를 매우 압축하고 있다. 몽룡과 춘향의 만남과 사랑은 매우 핵심적으로 축약되고, 그들 캐릭터 자체는 물론 다른 캐릭터들(방자, 변학도, 향단)도 매우 자제되어 있다(월매는 제외). 아울러 전체 이야기는 인상적인 판소리와 결합된 부분만(그리고 극의 전개 상 필요성에 따라) 에피소드처럼 화면에 등장한다.

이 영화가 판소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몽룡이 거지 꼴로 돌아 와 춘향이를 만나러 옥사로 가는 모습을 찍은 장면이다. 이 부분은 판소리를 매개로 하여 접근하지 않았다면 절대 그 어느 〈춘향뎐〉에서도 볼 수 없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대부분 이런 장면은 생략하고 바로 월매 집에서 옥사 장면으로 넘어갔을 테니까.

임권택 감독은 이러한 판소리 중심의 영화를 만들면서 관객들이 그 멋과 맛에 좀 더 접근하기 쉬운 길을 열어 주려고 했다. 하지만 영화 도입부에 과제물 때문에 판소리 공연을 보러 온 대학생들의 모습에서 보이듯이,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는 두고 봐야 할 일이다. 감독 스스로도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화면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니까.....

[사족]
〈춘향뎐〉의 결말이 신분사회의 모순을 은폐하고 호도한다는 지적이 진보진영으로부터 제기되어 온 것이 이미 한 두해가 아니다. 이를 의식한 것일까? 감독은 마지막 춘향을 구출하고 나서, 압송되는 변학도와 몽룡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넣었다. 이들은 춘향의 수절 고수에 대한 처벌의 경중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실제로는 당시 사회에서 춘향의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감독의 해석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