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경제학 2 - 바로크 시대의 음악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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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궁정음악가들이 작곡한 음악은 '주인' 의 소유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악보를 팔아넘길 수 없었다. 하지만 '태양왕' 루이 14세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장 밥티스트 륄리(1632~67) 의 경우는 달랐다.

자신의 허락 없이는 악보의 인쇄.배포.판매.연주를 할 수 없도록 못박았고 이를 어기면 1만 프랑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파리 왕립음악원을 창설했던 륄리는 매주 화.금.일요일 오페라 공연이 열리면 극장 입구에서 직접 입장료를 받다가 시간이 되면 지휘대 위에 올랐다. 그는 1713년 한해 동안 오페라에서만 1천 프랑을 벌어들였다.

홍두깨 같은 지휘봉으로 마루 바닥을 내리치면서 박자를 맞추던 그는 실수로 자신의 발등을 찍는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금화 3만3천루이(1루이는 20프랑) 에 이르는 막대한 재산은 유언에 따라 생텐느 가톨릭 수녀회에 기부됐다.

악보 출판에 대한 독점권을 부여받은 것은 헨리 8세 당시의 궁정음악가 토머스 탈리스.윌리엄 버드도 마찬가지였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의 지휘자.오르가니스트로 봉직할 때 첫 월급은 87 탈러였다. 땔감.양초.옥수수.포도주는 따로 지급되었다. 당시 최저 생계비는 1백 탈러. 하지만 한달 총수입은 7백 탈러였다. 레슨비.결혼식.장례식 연주료 등 부수입을 합친 것이었다.

그는 라이프치히가 다른 도시에 비해 대기오염이 심하지 않아 장례식 건수가 많지 않음을 한탄했다.

바로크 시대의 오르가니스트들은 교회 소속의 하급 직원이었다. 음악 연주는 물론 학교 교사, 마을의 서기관 일도 맡아보았다. 공증.대서.법률상담도 해주었고 오페라 매니저.출판업자를 겸하는 오르가니스트도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사회적 지위는 높지만 대우는 좋지 않은 궁정음악가보다, 지위는 낮지만 부수입이 많은 함부르크 같은 자유도시의 지휘자나 오르가니스트가 되기를 원했다.

바흐도 북독일의 뤼벡에서 북스테후데의 후계자가 되길 원했지만, 그의 못생긴 딸과 결혼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쾨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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