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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나면 포탄은 못 날라도 군인들 밥이라도 짓겠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예순을 넘은 나이에 해병대 극기훈련을 받은 사람. 한국전쟁 파병국가의 우정을잊지 말자고 신문에 광고를 낸 사람. 젊은이들이 우리 역사를 잘 모른다고 걱정하는 사람. 이쯤 되면 퇴역 군장성이나 인문학 노교수, 보수 논객을 떠올리게 된다. 뜻밖에도 주인공은 롯데백화점 이철우(68·사진) 사장이다. 그는 “애국심 있고 정체성 분명한 직원이 일도 잘한다”고 말했다. 이어 “돈을 버는 경영자이지만, 기업이 적극 역할을 해야 할 부분이 나라 사랑”이라고 덧붙였다. 연 매출 10조원이 넘는 국내 최대 유통회사 최고경영자(CEO)의 애국론이다. 중앙SUNDAY는 4월 25일 오전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사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집무실 벽면은 온통 책이었다. 족히 1000권은 넘는 것 같은데, 역사·인문학책이 많아 눈길을 끌었다. 인터뷰는 점심시간을 넘겨 2시간 동안 이어졌다

-지난해 ‘한국전쟁 파병국의 우정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신문광고를 냈다. 이익을 추구하는 백화점이 그런 광고를 내서 놀랐다.
“지난해가 6·25 60주년이었다. 파병국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시작했다. 후배들이 잊고 있는 일에 대해 선배들이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사업에는 별 도움이 안 될 텐데.
“그렇지 않다. 나도 비즈니스맨이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 회사에 플러스인지, 마이너스인지 생각한다. 당장은 효과가 없어도 우리 회사가 좋은 이미지를 쌓으면 언젠가는 플러스가 되지 않겠나.”
-파병국 중 에티오피아의 사정이 딱하다고 들었다.(※에티오피아는 한국전쟁에 3518명이 참전해 657명의 사상자를 냈다)
“에티오피아는 잘살았던 나라다. 그런데 그 뒤 공산화됐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공산당과 싸운 사람들이 불이익을 받게 됐다. 그 자손들은 학교도 못 다니고, 한 마을에 모여 비참하게 사는 모양이다. 처음엔 이들에게 커피농장을 만들어주고, 그 커피를 우리 회사가 전량 수입하려 했다. 하지만 그쪽 정부에서 막았다. 그 뒤 도울 수 있는 것을 찾다가 교육시설과 아이들 축구장을 만들었다. 필리핀도 도울 예정이다.”
-파병국 외에 다른 나라도 도왔나.
“우리도 옛날에 그랬지만, 베트남 오지에선 아이들이 10리, 20리를 걸어서 통학하는 일이 많다. 오가는데 서너 시간 걸리니 정작 공부할 시간은 얼마 안 된다. 학교 두 곳과 기숙사를 지어줬다. 각 1억여원씩 들었다. 그 돈 갖고 한국에서 그 정도 보람 있는 일을 하기 어렵다. 최근엔 동티모르를 돕고 있다. 중고 컴퓨터 등 생필품을 컨테이너로 실어 보냈다. 동티모르에선 한 명이 1년간 대학을 다니는데 100달러면 된다더라. 10만원이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다. 그 학생들이 20~30년 후 나라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한국의 은혜를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게다. 우리와의 외교관계나 경제교류가 얼마나 돈독해지겠나.”
-민간 외교관인 셈이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 장관이 베트남·동티모르 얘기를 듣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하더라. 하지만 정부만 그런 일 하란 법 있나. 비즈니스맨이 다 민간 외교관이다.”
-직원들이 2박3일간 해병대 극기훈련을 받는다고 들었다.
“2003년 롯데마트 사장 때 도입했다. 당시 롯데마트는 후발주자여서 외부인력을 많이 채용했다. 조직이 일사불란하지 않았다. 여러 회사 사람이 모여 있으니 생각이 다르고, 쓰는 용어도 제각각이었다. 롯데마트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해병대 훈련을 받도록 했다. 처음엔 ‘꼭 해야 하나’며 뒤에서 말이 많았다. 임원회의 때 내가 1기 1번으로 훈련에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조용해지더라. 훈련 후 조직이 많이 끈끈해졌다. 귀신 잡는 해병 아닌가. 해병 같은 전우애가 비즈니스 조직에도 필요하다.”
-훈련이 힘들었을 텐데.
“ROTC 3기로 강원도 철원에서 군 생활을 했다. 하지만 나이가 있지 않나. 당시 예순이 넘었다. 게다가 1기니까 얼마나 세게 받았는지…. 훈련대장 말이 사장이 직접 훈련받은 게 처음이고, 예순 넘은 사람이 훈련받은 것도 처음이라더라. 더운 날씨였는데, 팔에 화상을 입었다. 피부과에 갔더니 2도 화상이라며 의사가 왜 이렇게 됐느냐고 묻더군. 며칠 동안 쓰라려 잠도 못 잤다. 2기부터는 전부 선크림을 준비하라고 했다.”
-겪어봐야 그런 지침을 내릴 수 있겠다.
“내가 1기 1번으로 들어간 이유가 있다. 리더는 솔선만큼 중요한 게 없다. 그런 훈련을 먼저 체득해야 부하들을 거느리고, 통제할 수 있다.”
-여성 직원들도 참여하나.
“우리나라 여성들 참 강하다. 훈련도 남성들과 똑같이 다 해내더라. 이렇게 강한 여성들이 똑똑한 자식을 낳고 길러줘 우리가 이만큼 사는 거 아니냐.”
-올해도 직원들이 훈련받나.
“회사의 미래는 조직의 허리에 해당하는 30대 직원들에 달려 있다. 3급 대리는 남녀 구분 없이 모두 이 과정을 거친다. 올해는 2급 과장도 받도록 했다. 모두 850명이 8차에 걸쳐 강원도 춘천에 있는 기화연수원에 들어간다. 야간행군과 도하훈련, 11m 높이 강하훈련 등 만만치 않다. 졸업 때의 사기충천은 말로 표현 못한다. 졸업식 때마다 내가 훈련장에 가서 한 명 한 명의 소감을 듣는다. 4~5시간이 걸리지만, 직원들과 하나가 되는 소중한 자리다.”

롯데백화점 직원들이 지난달 27일 강원도 춘천 기화연수원에서 해병대 훈련을 받고 있다.


-지난해 천안함·연평도 등 끔찍한 일이 많았다.
“울분도 있고, 안보의식이 너무 취약한 거 아닌가 걱정이 된다. 자꾸 이런 얘기하면 나 보고 보수라고 한다. 세상 모든 사람은 나이 들면 보수가 되는 거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해야 하는 게 여러 가지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건 안보다. 정치는 잘 모르지만, 국가를 지키려면 하나가 돼야 한다. 낭비가 많아 안타깝다. 전쟁 나면 나 같은 사람은 무거운 포탄 나르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전쟁터에서 군인들 이발해 주고, 밥이라도 짓겠다. 국민으로서 당연한 거 아닌가.”
-요새 젊은이들이 해병대 자원도 늘고, 애국심도 넘친다. ‘P세대’라는 용어도 생겼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유와 평화는 나라가 강해야 지켜지는 것이다. 강한 군대와 강한 국민의식이 필요하다. 남이 지켜주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8, 9세였는데, 서울 사람이라 전쟁의 참상을 100% 경험했다. 비참한 건 다 봤다. 북한 위정자들은 정말 나쁜 사람들이다. 자기들은 호의호식하고, 북한동포들은 고생하게 만들고.”
-올 3·1절 때 백화점에 대형 태극기를 내걸었다. 일본 고객들이 불편해하지 않았을까.
“뭐가 불편한가. 일본 가면 일장기 있고, 미국에는 성조기 있는 게 당연하다. 우리나라에서 태극기가 펄럭이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국기는 국민과 가장 밀접한 상징물이다. 외국은 국기가 밤낮으로 펄럭인다. 그런데 우리는 장롱 속에 넣어두었다가 3·1절, 광복절 등 특별한 때만 내건다. 사업차 해외에 나가보면, 외국 협상 파트너들은 한결같이 국가관이 뚜렷하고 자부심이 많더라. 너무 부끄러웠다. 그래서 태극기 마케팅을 시작했다. 점포마다 대형 태극기를 걸도록 했다. 아무 때나 신나게 걸고, 자부심을 느끼라고.”
-직원들이 승진하려면 한국사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는데, 백화점 이미지와 한국사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
“애국심 있고 정체성 분명한 직원이 간부가 되고, 성과도 좋다. 자기 나라 역사도 모르는 사람이 일을 잘할 것 같은가. 그런 취지에서 시작했다. 하루는 출근 길에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를 찾아갔다. 대뜸 직원들에게 역사 공부를 시키고 싶으니, 1년에 두 번 역사문제를 출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노 교수가 흔쾌히 승낙하더군. 요새는 직원들에게 한국사능력검정시험(歷試·역시)을 보도록 한다. 승진하려면 일정 등급을 따야 한다.”(※지난해까지 4년간 이 회사 3149명이 역시 2~3급을 땄다)
-중앙일보가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하자는 어젠다를 제시해 결실을 봤다. 한국사는 내년부터 고등학교 필수과목이 된다.
“대학에서 한국사 시험을 안 보고, 심지어 사관학교에도 없다는 걸 처음 알았다. 고시 시험과목에도 빠져 있고. 고시 붙으면 10년, 20년 후 나라를 경영할 사람들인데, 한국사 공부도 하지 않는다니 말이 되나. 나도 사회지도층의 한 사람이니, 정부가 뭐 하고 있느냐고 탓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해야지. 재계에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들이 늘고 있다. 포스코 정준양 회장, GS 허창수 회장, 호남석유화학 정범식 사장도 직원들에게 역사 공부를 시킨다.”

고현곤·홍주희 기자 hkk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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