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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이 소설을 꿈꾸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기자들은 너나없이 소설을 쓰고 싶어한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그렇다. 그 어떤 직업군보다도 기자(記者)라는 직업을 가진 자(者)들은 소설에 대한 꿈을 오래 간직할 것이다.

 나도 몇 해 전 어쭙잖은 소설을 출간한 적이 있다. 권력과 정의(正義), 그리고 인간의 욕망을 추리(推理)라는 형태로 형상화한 것이었다. 그 책은 3쇄까지 찍긴 했지만 ‘대박’과는 거리가 멀었다. 코피 터지게 바쁜 현역 기자가 책을 쓰는 것 자체도 고통이었다. 그런데도 내 맘속엔 아직도 깊은 계곡의 안개처럼 스멀대는 게 있다. 언젠가 다시 소설을 쓰겠다는 욕망이다. 러너즈 하이(runner’s high). 마라톤을 뛰다 보면 죽을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엄청난 희열을 느끼고, 그래서 또 뛴다고 한다. 그 비슷한 감정 같다.

 내 경험에 비춰볼 때 기자들이 소설을 꿈꾸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로 좀 진부해 보이지만 창작 열망이다. 기자는 남의 얘기, 다른 사람이 저지른 일을 대중에게 요약해 전달하는 게 업(業)이다. 그 세계에서 팩트(fact)는 신성불가침이다. 초년병 땐 팩트를 쉽고 간결하게 전달할 방법을 찾느라 머리를 쥐어뜯는다. 한 십여 년 하다 보면 슬슬 회의감이 생긴다. 남의 편지를 열심히 배달하는 우편배달부도 가끔은 “편지를 쓰고 싶다”는 열망을 느낄 것이다. 인간에겐 새로운 뭔가를 창조하려는 본질적 욕망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글쓰기가 전업인 기자가 그림이나 연주를 통해 창작욕을 실현하긴 힘들다. 그렇다면 대안은 뻔하다.

 둘째는 경험의 다양성이다. 다양한 취재원이 쏟아내는 수많은 이야기 중 99%는 기사와는 상관없다. 소설로는 안성맞춤인 내용이 수두룩하다. 피비린내 나는 사건현장은 말할 것도 없고 국회의사당이든, 병원 응급실이든, 오페라 무대든 간에 인간의 나약함과 위대함은 어디서든 펼쳐진다. 그렇게 따끈따끈한 재료들이 통째로 기억의 쓰레기통에 내던져지는 걸 안타까워하지 않을 기자는 별로 없다.

 셋째는 자만심이다. 남들의 소설을 읽다 코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엉터리군, 이 정도면 나도 쓰겠다” 하는 생각이다. 직업 소설가들의 묘사가 사실과 동떨어질수록 더욱 그렇다. 기자들의 교만이다. 그러나 창작 욕구를 부추긴다는 점에선 그리 나쁜 것도 아니다.

 기자가 소설가로 성공하긴 하늘의 별 따기다. 전설적인 인물이 몇 명은 있다. 『양들의 침묵』과 『레드 드래건』 등 연쇄살인범 소설로 히트를 친 토머스 해리스는 경찰기자 출신이다. j 가 인터뷰한 마이클 코널리의 책도 4500만 권이 팔렸다고 한다. 코널리는 형사, 변호사, 기자 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소설을 쓴다. 현장감과 묘사의 수준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최근에는 스웨덴 ‘엑스포’라는 잡지의 편집장 스티그 라그손의 유작인 『밀레니엄』 시리즈에 독자들이 열광한다.

 기자 출신 외국 작가들의 소설을 읽다 보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그들의 성공 배경이 된 방대한 영어권 시장이 부럽다. 한국어 시장은 좁으니까. 하지만 나를 포함해 한국 기자들이 쓴 많지도 않은 장르소설이 과연 그들의 소설만큼 풍부한 내용과 극적 긴장감을 갖추고 있는지 따져보면 부끄럽다. 소설은 세상과 접하는 기자의 통찰력과 상상력의 반영이다. 한국처럼 복잡한 사회를 취재하는 기자들이 쓴 소설은 외국 소설보다 더 기가 막혀야 맞다. 그런데 못 그러고 있으니까.

김종혁 중앙SUNDAY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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