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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민주당, 북한인권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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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강찬호
정치부문 차장

“내가 직접 박동진 외무부 장관에게 100명이 넘는 정치범 명단을 전달하고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1979년 7월 서울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직후 사이러스 밴스 미 국무장관(당시)은 기자들에게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의 인권문제를 자세히 토의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기자들은 “장기 연금 중인 김대중(DJ)씨도 명단에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밴스 장관은 “한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면 전부 다 거명해야 한다”며 답변을 피했지만 명단에 DJ가 들어있던 건 불문가지였다.

 DJ는 이처럼 미국이 집요하게 한국 정부에 인권문제를 물고 늘어진 덕분에 여러 번 목숨을 건졌다. 특히 80년 DJ가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자 카터와 차기 대통령 레이건은 “DJ를 처형하면 한·미 관계가 심각히 손상될 것”이라고까지 신군부를 협박해 감형 조치를 끌어냈다.

 이런 DJ를 대부로 모신 민주당이 북한인권법을 무조건 반대하는 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지난주 민주당은 국회 법사위에 14개월째 계류돼온 북한인권법안의 상정을 또다시 거부했다. 이들은 “북한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해 정치적 인권보다 생존권, 먹을 권리부터 챙겨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데 이는 민주당이 그렇게 싫어하는 박정희 정권의 ‘한국식 민주주의’ 논리와 판박이다. 박 정권은 “ 나라가 잘 살고 국민이 배부를 때까지 자유(인권)는 일정 부분 유보해야 한다”며 유신 철폐를 요구한 DJ를 옥에 가뒀다. 민주당은 DJ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긴 개발독재 논리를 자가당착적으로 반복하지 말고, 북한 주민의 먹을거리와 인권을 다 함께 챙기는 정당으로 거듭나야 한다.

 민주당은 또 “인권은 외부에서 압박해봤자 실효성이 없다”는 구실도 내세운다. 이 또한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미국이 이런 논리를 들먹이면서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과 DJ 사형 선고에 팔짱만 끼고 있었다면 DJ는 어떻게 됐을까. 인권 개선은 체제 내부의 민주화 움직임이 핵심동력임은 맞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을 촉진하기 위해선 외부의 지속적인 문제 제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쯤 되면 민주당은 “다 좋은데, 인권문제를 꺼내면 북한이 대화를 거부할 것”이란 변명으로 넘어가려 할 것이다. 미국은 이미 7년 전 북한인권법을 제정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스토커’란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미국에 대화를 애걸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1월엔 한성렬 북한 유엔 대표부 대사가 로버트 킹 미 북한인권특사를 자청해 만나 식량을 달라고 요청했다. 북한이 ‘대북 고립압살정책 앞잡이’라고 비난해온 미국의 북한인권특사를 대화 창구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인권문제가 일단 외교무대의 문지방을 넘으면 오히려 대화를 촉진하는 채널로 발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민주당은 인권투사 DJ와 인권변호사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부디 이성을 되찾고 진정 무엇이 북한을 위하는 길인지 깊이 생각하길 바란다.

강찬호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