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① 나훈아의 초년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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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인생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1960~70년대 충무로에서 영화와 함께 청춘을 보냈고, 9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간 정치인의 삶을 살았다. 이번 연재가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그간 겪어온 사건과 시대, 사람을 돌아보려고 한다.

내가 붓글씨로 직접 쓴 연재 타이틀 ‘청춘은 맨발이다’는 나의 대표작 ‘맨발의 청춘’(1964)에서 따왔다. 젊은이에게는 희망을, 중·장년에게는 활력을 주고자 하는 바람에서다. 기회를 제공해준 중앙일보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영화 인생 50년-. 그간 수많은 별이 뜨고 스러졌다. 뒤돌아보니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수 나훈아(본명 최홍기)와의 인연은 특별하다. 지금은 대단한 가수 반열에 올라 있지만 내 머릿속에는 시커멓고 여드름투성이로, 대게 껍데기 뒤집어놓은 것 같은 신인 가수 나훈아의 얼굴이 선하다.

1976년 나훈아와 김지미가 TBC 등 언론이 모인 가운데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당시 최고의 여배우가 연하의 가수와 결혼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중앙포토]

 69년 무렵 서울시민회관(구 세종문화회관)에서 ‘10대 가수쇼’가 열렸다. 그해 최고의 가수만 초대되는 무대였는데 흥행을 위해 신성일의 이름을 내걸었다. 당시 나는 한 해 400만원의 세금(연예계 최고액)을 낼 정도로 최고 톱스타 자리에 있었고, 풋내기 신인 나훈아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으로 신인가수상을 받아 그 무대에 합류한 것이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나훈아가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어린 친구인데, 얼굴이 꽤 못생겼다고 생각했다. 나훈아로선 내 근처에도 오기 힘든 처지였다. 연예계 족보를 따져도 한참이나 차이가 나는 데다 내가 건방진 후배는 손을 봐준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살짝 놀려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훈아, 너 여드름 고치는 방법을 알려줄까?”

 그가 큰 관심을 보였다.

 “나이 먹은 여자와 연애해봐.”

 “정말입니까?”

 나훈아는 그 말에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사라졌다. 우리가 다시 만난 건 정확히 1년 후 같은 무대에서였다. 이번에는 실제로 ‘10대 가수쇼’ 멤버로 선발돼 나타났다. 대기실에서 보니 1년 만에 얼굴이 깨끗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살짝 놀랐다.

 “야, 훈아. 얼굴 깨끗해졌다.”

 그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말씀대로 했더니 깨끗해졌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엄청 웃었다. 대기실에 있던 다른 가수들도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뒤집어졌다. 얼마 후 위기에 몰린 나훈아를 구해준 사연도 있다. 그는 73년 무렵 배우 고은아의 사촌인 이모씨와 결혼한 상태로 공군에 입대했다. 이모씨는 군 생활 중인 나훈아가 김지미, 가수 J와 외도를 하고 있다는 투서를 공군방첩대(OSI)에 넣었고, 이 사건은 공군 수뇌부까지 보고돼 내부에서 문제화됐다. 심지어 가수 J의 집을 덮쳤을 땐 나훈아는 없고 군화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엄앵란(左), 주영복(右)

 그때 나훈아는 현미를 앞세워 우리 집을 두 번이나 찾아왔다. 나와 집사람(엄앵란)이 주영복 공군참모총장과 막역한 사이라는 걸 알고 사건을 무마해 달라고 온 것이었다. 그는 집사람에게 엄청나게 사정을 해댔고, 집사람은 “나훈아를 꼭 구해줘야겠다”며 나와 주 총장을 설득했다. 결국 주 총장은 집사람 앞에서 “이 문제는 사생활이니 군이 관련할 것 없다”며 투서를 찢어버렸다.

 그는 사건이 해결된 후 나를 찾아와 인사했다. 나는 “정릉 문제(김지미와의 관계)는 끝난 거냐”고 물었는데 그는 그렇다고 했다. 당시 김지미는 정릉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나훈아와 김지미의 결혼이 발표됐다. 나로선 씁쓸한 기분이었다. 어찌되었든 우리 부부가 나훈아와 김지미 커플의 탄생을 도운 셈이었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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