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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 아날로그로 디지털을 잡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인터넷 인구가 늘면서 몇 년 전 미국에서는 논쟁이 하나 벌어졌다.

청소년 보호를 위해 인터넷상의 음란물을 규제해야 하느냐 마느냐는 논란이었다.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당연히 높았다. 많은 시민단체가 나서서 규제를 위한 입법을 촉구했다. 그러나 미 의회나 정부는 한쪽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솔깃해 했던 것은 "소프트웨어나 콘텐츠 산업의 발전을 가로막지 않으려면 그냥 놔둬야 한다" 는 주장이었다.

음란물이 정 문제가 되면 인터넷 상에서 음란물을 차단하는 새 소프트웨어가 여럿 나올 것이고, 이는 곧 새로운 시장의 창출을 뜻한다는 논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음란물을 차단하는 소프트웨어가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워낙 ''표현의 자유'' 가 강조되는 미국인지라 음란물 사이트 규제도 기본권 침해라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을 얻었지만, 신선했던 것은 역시 "음란물도 콘텐츠다" 는 사고방식이었다.

한국의 공정거래위원회는 9일부터 ''전자거래 소비자보호지침'' 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갔다. 소비자보호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이 지침은 입안 단계에서부터 업계와 산업자원부 등의 반발에 부닥쳤었다.

''전자상거래의 싹을 꺾는 규제 법안'' 이라는 것이 반대논리의 골자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반대 의견을 일부 받아들였지만 업계나 산자부의 불만은 여전하다.

예컨대 "전자상거래 사업자는 공인인증기관으로부터 믿을 만한 사이버 몰로 인정받았는지 여부를 명시해야 한다" 는 규정에 대해 업계나 산자부는 어이없어 한다. 마땅한 인증기관이 있지도 않거니와 설령 있다 하더라도 인증을 받아 이를 소비자들에게 홍보하는 것은 구멍가게든 백화점이든 사업자가 알아서 할 일이지, ''전자거래'' 를 한다 해서 반드시 인증을 받으라는 게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최근 무역협회는 정부에 대해 사이버 무역과 관련된 콘텐츠제공업.정보서비스업의 세금 부담을 낮춰달라고 건의했다. 국세청의 표준소득률(장부를 기장하지 않고 신고한 외형 중 얼마를 소득으로 보는가 하는 비율) 이 제조업은 9~10%인데 콘텐츠제공업은 39.6~43.5%로 높다는 것이다.

억울하면 장부를 정확히 쓰면 되고, 또 외형 중 비용이 얼마나 들어갔을까를 따지는 세법논리로 보면 맞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집에서 컴퓨터 한대 놓고도 시작할 수 있는 콘텐츠제공업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밖에도 "유통업이라면 창고가 있어야 하는데 창고가 어디 있느냐" 고 꼬치꼬치 따지는 세무공무원에게 한참 애를 먹었다는 전자상거래 사업자는 많다. 사이버와인숍을 창업,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 소비자들에게 와인을 팔려던 한 여사장이 주세법과 국세청 고시에 발목을 잡힌 경우도 있다. 청소년 보호와 탈세방지를 위해 인터넷에선 포도주를 팔 수 없다는 것이다.

PC방은 또 어떤가.

전세계 어디를 가봐도 한국의 PC방만큼 기발한 작품은 없다.

정부 지원 없이도 이미 전국의 PC방은 1만개가 넘었고 집에 컴퓨터가 없는 학생들도 몇천원만 내면 초고속 인터넷 통신망에 연결된 펜티엄 3급 컴퓨터를 거의 하루 종일 쓸 수 있다.

얼마전 인터넷 사업 제휴 검토를 위해 서울을 찾았던 한 미국인 사업가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취미가 각국의 ''달동네'' 사진을 찍는 일이라 어디 한 곳을 들렀는데 이곳 저곳의 PC방을 들어가 보곤 충격을 받아 "이런 나라라면 인터넷 사업을 빨리 시작해야겠구나" 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런데도 국내에선 문화관광부가 ''음란.비디오.게임물법'' 에 따라 PC방을 규제하겠다는 발상을 하고 있다. 게임전용 PC가 전체의 30%를 넘어서는 안된다'' 는 식이다.

디지털 혁명과 함께 산업과 시장은 하루가 바쁘게 변하며 판을 완전히 새로 짜가고 있다.

이를 뒤늦게 따라가기 바쁜 정부가 아날로그 시대의 법규와 제도를 단순 연장하며 발목을 잡지말고 스스로도 완전히 판을 새로 짜야 한다.

김수길 <경제담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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