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협상의 달인’ 홀브룩 전 유엔대사, 유고내전 종식협상 스토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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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브룩

유고슬라비아 내전(1991~95년)을 종식시킨 역사적인 데이턴 협정 당시의 긴박했던 막후 협상 과정이 공개됐다. 데이턴 협정을 성공시킨 주역인 리처드 홀브룩(Richard Holbrooke·지난해 12월 사망) 전 유엔 주재 미국 대사의 부인이자 언론인인 케이티 마튼에 의해서다. 그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에 19, 20일 2회에 걸쳐 이를 공개했다. 마튼은 당시 남편의 요청으로 협상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협상은 95년 11월 1~21일 3주간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에서 열렸다. 마튼에 따르면 홀브룩은 B-2 전략폭격기가 있는 거대 격납고를 협상장으로 잡았다. B-2는 레이더에 걸리지 않고 지구의 반대편까지 날아가 정밀폭격을 할 수 있는 가공할 무기체계다. 유고 내전에서 ‘발칸의 방화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인종 청소에 앞장 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당시 유고연방 대통령에게 미국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유고 내전은 인종 청소 등으로 25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최악의 분쟁으로 꼽힌다.

 마튼은 “외교적 협상을 통해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협상 참가자들의 인간적 요소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며 “평화 협상의 성공은 협상 참가자들의 정신과 동기, 분쟁의 역사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진 협상자에 달렸다”고 지적했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을 종식시키는 협상을 미국에서 한다는 걸 탐탁지 않아 했다. 프랑스 협상 대표인 자크 블로트는 탐지견이 폭발물 검사를 하려 하자 화를 내며 협상 개회 만찬에 불참하기도 했다.

 홀브룩은 적대감이 깊은 밀로셰비치와 알리야 이제베고비치 당시 보스니아 대통령 사이에 부인 마튼을 앉혔다. 마튼은 “두 사람이 어떻게 처음 만났느냐”는 질문으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두 정상은 “전쟁이 이렇게 격화될 줄 몰랐다”고 토로했다.

 협상 마지막 밤인 20일에도 진전이 없었다. 특히 밀로셰비치와 하리스 실라지치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당시 총리가 서로 양보 없는 설전을 벌였다. 그러다 두 사람이 21일 새벽 4시 협상을 타결하고 악수하자 크로아티아 외교장관이 협상장에 뛰어 들어와 “크로아티아 땅을 한 치도 내줄 수 없다”며 협상 무효를 선언했다. 홀브룩은 “잠시 눈을 붙이자”고 제안한 뒤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했다. 클린턴은 홀브룩의 요청을 받아들여 프란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에게 연락해 크로아티아 외무장관이 협상에 걸림돌이 되지 못하도록 하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럼에도 협정은 서명되지 않았다. 보스니아가 막판에 영토의 일부도 양보하지 못하겠다고 버텼기 때문이다. 홀브룩은 미국 대표단에게 짐을 싸라고 지시하고 협상장 밖에 짐을 늘어놓았다. 협상이 무산되는 걸 원하지 않은 밀로셰비치는 양보했다. 95년 11월 21일 역사적인 데이턴 협정이 체결됐다. 그 뒤 유고에서는 총소리가 사라졌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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