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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터지는 메르켈 속 타는 파판드레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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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앙겔라 메르켈(57) 독일 총리와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59) 그리스 총리는 지난해 4월 23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났다.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요청한 지 몇 시간 뒤였다. 둘은 두 손을 꼭 잡았다. 남녀를 초월한 맹우(盟友) 같았다. 한 사람은 구원을, 다른 한 사람은 약속 이행을 공언했다.

한 해가 흘렀다. 메르켈은 1100억 유로(165조원)가 넘는 돈을 그리스에 지원했다. 그런데도 파판드레우는 계속 손을 벌리고 있다. 둘 다 이런 상황이 고달픈 걸까. 요즘 둘은 티격태격하고 있다. 그리스 채무구조조정(워크아웃)을 두고서다. 메르켈은 “워크아웃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파판드레우는 “필요 없다”고 응수했다.

 글로벌 시장의 컨센서스는 그리스가 워크아웃을 피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파판드레우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말인가. 그의 속셈은 다른 데 있다. “그는 한 수 더 멀리 내다보고 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최근 보도했다. 그의 눈은 워크아웃 자체가 아니라 조건을 향하고 있다.

 파판드레우는 ‘헤어컷(haircut, 원금 일부 탕감)’을 원한다. 그는 “헤어컷 없는 워크아웃은 필요 없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메르켈은 교과서적인 워크아웃을 주장한다. 만기 연장과 금리 깎아 주기 정도는 해줄 수 있다는 의미다.

 양쪽 모두 퇴로는 막혀 있다. 비켜설 데가 없는 외나무 다리에 서 있다. 메르켈이 원금을 탕감해 주면 당하는 건 독일 은행들이다. 독일 은행들은 그리스에 363억 유로(57조3000억원)를 꿔줬다.

그나마 도이체방크나 코메르츠방크처럼 큰 은행은 견딜 수 있다. 중소 은행이 문제다.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는 “그리스에 빌려준 돈 가운데 70%가 중소은행한테서 나왔다”고 보도했다.

 독일 중소 은행은 체력(자본여력)이 약하다. 전문가들이 예측한 대로 그리스 채권 원금의 20~50%만 떼여도 위기에 빠진다. 이들이 줄줄이 쓰러지면 독일 내에서 돈의 혈맥이 막힐 수 있다. 일반 기업들이 타격 받는다. 그 은행들은 덩치는 작지만 독일 기업들엔 아주 중요한 젖줄이다. 메르켈은 니콜라 사르코지(56) 프랑스 대통령의 뜻도 대변해야 한다. 사르코지는 프랑스 은행들이 그리스에 꿔준 619억 유로(97조1800억원)를 받아내야 한다. 로이터 통신은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만기 연장만 이뤄져도 많은 은행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고 21일(한국시간) 보도했다.

 반면 헤어컷 없는 워크아웃은 파판드레우에게 빛 좋은 개살구다. 부채 3250억 유로(약 510조원)가 그를 짓누르고 있다. 적정 규모(1500억~1600억 유로)의 두 배를 넘는다. 지금은 구제금융을 받아 연명하고 있다. 원금의 일부를 탕감받지 않으면 그리스는 내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게 정설이다. 유럽연합(EU)의 현재 구제금융은 내년 중 바닥난다. 상설 구제금융 펀드는 한 해 뒤인 2013년에나 설정된다.

 그리스 워크아웃은 메르켈과 파판드레우가 합의해야 연착륙할 수 있다. 그리스가 채무불이행(디폴트)이나 상환연기(모라토리엄)를 선언한 이후 상황에 떠밀려 워크아웃에 들어가면 채권 금융회사들은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과거 경험이 말해 준다. 1998년 러시아 채권자들은 원금의 45.7~69.2%를 포기해야 했다. 아르헨티나 채권자들은 최대 76.9%까지 헤어컷 당했다.

 채무국들은 이후 10년 가까이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따돌림당했다. 자금이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만큼을 조달하지 못해 경제 성장이 지체됐다. 외나무 다리에서 두 사람이 어떤 묘수를 찾아낼지 글로벌 시장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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