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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역사의 감옥’에 51년째 갇힌 이승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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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4월이다. 이승만 정권을 몰아낸 4·19 혁명이 일어난 달이다. 1960년 4월 11일 마산에서 김주열 학생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바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게 도화선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12년 만에 권력을 내놓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권위주의 정권이 득세했던 70~80년대 대학가에선 4월만 되면 ‘민주화 시위’가 잇따랐다. 그 과정에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은 4·19 세대의 다음 세대인 40~50대에게까지 ‘부정선거를 한 독재자’의 이미지로 각인됐다. 세대를 건너뛰어 ‘역사의 감옥’에 갇힌 것이다. 운동권 학생들이 애독하던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은 이승만에 대해 ‘친일파를 중용하고 단독정부를 수립해 남북 분단을 고착화시켰다’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승만의 이미지는 만신창이가 됐다. 대한민국 정통성도 적잖이 타격을 입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초라해질수록 운동권 내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했다는 김일성에 대한 관심은 커졌다. 그렇게 80년대가 흘렀다.

21세기 들어 이승만 시대를 재평가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청년기엔 구국계몽운동, 장년기엔 독립운동, 노년기엔 건국·호국이라는 업적을 남겼다. 1904년(29세) 옥중에서 쓴 독립정신에선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개방·자유·외교·교육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국 후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을 확립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가 주도한 한·미동맹은 한국을 해양세력으로 편입시켜 번영의 틀을 다졌다. 이승만 재평가를 주장하는 몇몇 학자들은 “이승만 없는 박정희는 없다”고 말한다. 건국 대통령으로서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평가하자는 것이다.

중국에선 신중국 건설의 주역 마오쩌둥을 놓고 논란이 있었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의 광풍 속에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오에 의해 몇 차례나 죽을 고비를 겪은 덩샤오핑은 “공은 7, 과는 3”이라는 말로 마오쩌둥 격하운동을 잠재웠다. 덩 자신도 천안문 사태를 유혈 진압했지만 개혁·개방과 경제발전의 업적을 더 크게 평가받는다. 미국인들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에 대해 미·중 수교와 베트남전 종전, 중동평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한다.

우리 근·현대사를 말할 때 흔히들 오욕의 역사라고 말한다. 이승만을 비롯한 역대 대통령들을 가차없이 단죄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선진국 수준까지 도약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뿐이다. 한반도의 또 다른 반쪽인 북한이 최빈국으로 전락한 것과 정반대다.

대한민국 국가시스템과 지도자, 국민의 힘이 어우러진 결과다. 역사는 선과 악의 게임이 아니다. 역사의 감옥에 갇혔던 인물들에 대한 엄정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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