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몇 가지 풍경
④ 헤이그 밀사
이덕일 事思史 금대를 말하다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당사자인 박제순을 승진시켜 내각을 맡겼지만 의병들에게는 밀지(密旨)를 내려 거병을 촉구했다. ‘밀지 정치’도 고종 통치의 한 특성인데, 전 도사 정환직(鄭煥直)이 을사늑약 후 아들 정용기(鄭鏞基)와 함께 영남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킨 것도 고종의 밀지에 따른 것이었다. 고종이 정환직의 승리를 바랐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정환직이 과거 삼남검찰 겸 토포사로서 동학 및 의병 진압에 나섰던 것처럼 진위대도 고종의 명에 따라 의병 진압에 나섰다는 점이 문제였다.
고종은 재위 41년(1904) 9월에도 동학 비적 잔당이 다시 창궐한다면서 각 지방 진위대에 진압하라고 명했다. 그해 12월 말 참정대신 신기선은 사직 상소에서 “진위대 군사들은 비적을 핑계대고 백성들을 침학하고 있다”고 말했다. 진위대가 보면 비적이지만 국권 회복 차원에선 의병이었다. 의병은 고종이 몰래 내린 밀지에 따라 거병하고 진위대는 고종의 공개된 명령에 따라 진압하는 상황이었다. 고종은 외국 여러 곳에도 밀사를 보내 외교권을 되찾길 바랐다. 특히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큰 기대를 걸었다.
밀사 파견을 결심한 고종은 통감 이토와 머리싸움에 들어갔다. 당초 이토가 밀사로 짐작한 인물은 친러파 이용익(李容翊)이었다. 러일전쟁 때 러시아를 방문했던 이용익은 1906년 상해로 귀환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살아있었다면 밀사가 되었을 것이지만 불행히도 1907년 2월 급서했다. 그 후 일제는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를 주목했다.
위 보고서는 “동인(同人:헐버트)이 헤이그에 간다는 것은 소문에 지나지 않지만 혹시 한국 조정의 밀사라 칭하고 각국 위원을 역방(歷訪)하는 일이 있을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덧붙여서 고종의 밀사 파견을 정확히 예견하고 있었다. 박제순에게 발설한 내용은 이미 비밀일 수 없었다.
“이번에 체결된 조약은 강요로 맺어진 것이니 마땅히 무효입니다… 폐하께서 힘껏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준엄하게 물리쳐야 하는데, 천주(天誅:역적들을 죽임)를 단행해 빨리 여정(輿情)을 위로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도리어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수괴를 의정대신 대리로 임명해 신에게 그 아래 반열에 나가게 하니, 신은 분노가 가득 차고 피가 텅 비며 뜨거운 눈물이 강처럼 흘러 정말 갑자기 죽어서 모든 것을 잊고 싶습니다.(
김구는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어떤 사람이 흰 명주저고리에 갓망건도 없이 맨상투 바람으로 옷에 핏자국이 얼룩덜룩한 채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인력거에 실려가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누구냐고 묻자 참찬 이상설인데 자살 미수에 그쳤다고 한다.(
이상설은 앞의 상소에서 “아! 장차 황실이 쇠해지고 종묘가 무너질 것이며 조종(祖宗)이 남겨준 유민(遺民)들은 남의 신하와 종이 될 것입니다”라고 제국의 운명을 정확히 예견했다. 제국의 운명을 알면서도 이상설은 박제순·이완용처럼 그 운명에 편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상설은 1906년 4월 18일 이동녕과 함께 비밀리에 출국해 상해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통감부 간도 파출소장 사이토(齊藤季治郞)는 ‘서전(瑞甸)서숙 조서보고문서’에서 “이상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 군부대신 이용익과 전 주(駐)서울 러시아 공사 파바로프 사이를 왕복한 형적이 있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상설이 이용익을 만나서 논의한 것은 헤이그 밀사 파견에 관한 것이리라. 이상설의 출국 자체를 헤이그 평화회의에 참석하려는 목적이라고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용정의 이상설과 서울의 고종을 연결한 통로에 대해서 그간 많은 추측이 있었는데, 독립운동가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은 각종 사료와 일가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고종의 조카인 조남승(趙南昇)·조남익(趙南益) 형제라고 보고 있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가 명치 43년(1910) 6월 외무대신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조남승은 고종의 명을 받고 미국인 콜브란에게 전기회사의 주식을 매도했다”고 전한다. 이 자금이 밀사 파견 자금인데 흑룡회에서 편찬한
1907년 4월 20일 고종은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이위종을 평화회의 특사로 내락하고 수결과 국새가 찍힌 백지 위임장 등을 내려주었다. 위임장은 시종 조남익과 내시 안호형(安鎬瀅)의 손을 거쳐 조남승에게 전달되고 다시 상동청년학원에 극비리에 보내졌다. 상동청년학원의 이회영·이시영 형제, 전덕기, 양기탁 등은 이를 부사로 인준된 이준에게 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준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과 합류했다. 일본이 헐버트에게 신경을 쏟는 동안 고종은 이상설 카드로 허를 찌른 셈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밀사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자들(이준과 나유석)은 협의 결과 전 학부협판 이상설을… 이곳에 불러들여 다시 모의를 짜낸 결과, 한국의 장래에 관하여 직접 러시아 정부에 탄원하기 위해 위원을 간선하여 파견한다는 의논을 결정한 후 이준·이상설 등 3명이 결국 지난 21일 이곳을 출발하여 러시아 수도로 향한 바 있습니다.”
노무라는 이 문건에서 “또 파견위원은 만국평화회의 개최를 기회 삼아 헤이그에 가서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열국의 전권위원 사이에서 운동한다고 합니다”라고 정확히 보고하고 있다. 노무라는 또 “이러한 종류의 운동은 당초부터 아이들의 장난과 같으며 그와 같은 우매한 행동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고도 덧붙였다. 고종의 밀사 파견을 ‘아이들의 장난’으로 보는 이 대목에서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 인사들이 가졌던 국제적 인식의 한계를 느낄 수 있다. 러일전쟁 이후에는 청일전쟁 뒤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되돌려주게 만든 삼국간섭(러시아·독일·프랑스) 같은 기적이 재연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