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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공전 출신 김용관, 77년 전 4월 19일 ‘과학데이’ 첫 행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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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호 32면

매년 4월 21일은 ‘과학의 날’이다. 고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을 전담하는 부처를 신설해서 ‘경제기획원’과 양 날개 체제를 갖추고 이를 토대로 경제 발전을 추진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1967년 4월 21일 ‘과학기술처’를 신설하고 이날을 ‘과학의 날’로 정했다.

권기균의 과학과 문화 4월 21일 과학의 날 유래

그러나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의 날’은 1934년 4월 19일의 ‘과학데이’이다. 일제 치하에서 ‘과학기술 대중화 운동’을 주도했던 김용관(金容瓘)이 앞장서서 만들었다. 김용관은 1918년 서울공대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 요업과(1회)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장학생으로 1년간 일본 유학을 했다. 유학 중 그는 일본의 공업 발전과 근대화에 충격을 받았다.

귀국 후 그는 1924년 경성공전 동기생들과 ‘발명학회’ 설립을 추진했다. 발명가를 양성해 공업화를 추진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여건이 되지 않아 6개월 만에 중단됐다 1932년 과학기술 대중화 운동을 목표로 발명학회를 재건했다. 1933년 6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 과학 잡지 ‘과학조선(사진)’을 창간했다.

‘과학조선’은 4×6배판 크기에 30쪽 분량의 월간지였다. 이 잡지를 통해 특허제도, 외국의 발명사례 등을 소개했다. 생활과학, 가정 의학, 과학논단도 실었다. 전문 과학 지식에서 물산장려, 미신 타파, 문맹퇴치 같은 생활의 과학화와 일반 독자용 과학상식까지 다양했다. ‘과학조선’은 1944년 1월까지 발행됐다.

아무튼 1934년 2월 28일 김용관과 발명학회 인사들을 중심으로 31명이 기독교청년회(YMCA)회관에 모였다. 그들은 “과학 대중화를 위해 ‘과학데이’와 같은 적극적인 행사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전 사회적으로 자연과학 지식에 관한 열의를 ‘고취 앙양’ 하기 위해 ‘과학 주간’을 설정하고, ‘과학데이’를 정하는데 그날을 진화론의 창시자 다윈 사망 50주년 기념일인 4월 19일로 정했다.

다윈과 관련된 날짜를 정한 이유는 당시 유행하던 ‘약간 왜곡된 진화론적 사고’ 때문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진화론의 ‘적자생존’을 ‘우열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된 이유는 약해서이고, 승자가 되려면 힘을 길러야 하는데 과학이 무형의 힘 가운데서도 으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4월 19일 저녁 8시, YMCA 회관에서 제1회 ‘과학데이’ 행사가 열렸다. ‘과학의 개념’ ‘산업과 발명’ ‘화학공업의 최근 경향’을 주제로 강연도 했다. 800여 명이 참석했다. 메시지는 ‘한 개의 시험관은 전 세계를 뒤집는다’ ‘과학의 승리자는 모든 것의 승리자다’ ‘과학의 대중화 운동을 촉진하자’는 것들이었다.

다음 날은 100여 명이 과학관, 영등포방직공장, 중앙시험소, 중앙전화국 등을 견학했다. 21일엔 수송동 보통학교에서 ‘과학 활동 사진’을 상영했다. 오늘날의 영화다. 8000여 명 인파가 몰렸다. 이 일로 당시 지식인들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그해 7월 5일 조만식·여운형·송진우·김성수·주요한 등 지도급 인사들 100여 명이 참여해 ‘과학지식 보급회’를 결성했다. 김용관은 그 ‘과학지식 보급회’의 전무이사를 맡아 과학기술 대중화 사업을 전담했다.

1935년 제2회 ‘과학데이’ 행사는 ‘과학지식 보급회’의 주관으로 서울과 평양에서 열렸다. ‘과학데이’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1954대의 자동차가 종로에서 안국동을 돌아 을지로를 행진했다. 행사 표어는 ‘다 같이 손잡고 과학조선 위해 분기하자’ ‘과학의 황무지 조선을 개척하자’ ‘과학의 승자가 모든 것의 승자다’ 등이었다.

시인 김억이 작사하고 홍난파(1891~1941)가 작곡한 ‘과학의 노래’를 군악대가 연주했다. 저녁 행사에서는 경성보육학교 합창단이 ‘과학의 노래’를 불렀다. “새 못 되야 저 하늘 날지 못 하노라/ 그 옛날에 우리는 탄식했으나/ 프로페라 요란히 도는 오늘날/ 우리들은 맘대로 하늘을 나네/ (후렴) 과학 과학 네 힘의 높고 큼이여/ 간 데마다 진리를 캐고야 마네.” 이 노래는 1935년 ‘과학조선’ 8·9월호에 실렸었는데 한때 없어졌다가 2006년 ‘난파 연보 공동연구회’가 다시 찾아냈다.

1938년 제 5회 ‘과학데이’ 행사가 끝난 뒤 김용관은 항일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됐다. ‘과학지식 보급회’는 해체되고 이후로 ‘과학데이’ 행사도 중단됐다.

‘과학데이’의 출발 정신은 ‘과학 대중화’였다. 그러나 ‘과학기술로 경제 발전’을 강조하다 보니 전문가들만을 위한 ‘과학의 날’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이제 다시 보통사람들의 과학적 소양을 위해 문화로서의 ‘과학의 날’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과학의 날’을 ‘과학데이’인 4월 19일로 옮기자는 목소리도 제법 높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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