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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학생 기를 살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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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파리 특파원

“현장에서 인터뷰한 유학생 35명이 얘기하는 ‘한국 탈출’의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이들은 ▶획일적이고 양 위주인 교육 풍토가 싫다 ▶한국 대학은 창의성과 리더십 등 개인의 능력을 제대로 키워 주지 못한다 ▶세계 일류가 되려는 꿈을 실현하는 데 한국 대학은 한계가 있다.”

 중앙일보 2007년 6월 5일자(1면)에 실린 ‘1020 인재들 한국 탈출한다’는 기사에 담긴 내용이다. 당시 기자는 후배 기자 한 명과 하버드·예일·스탠퍼드·프린스턴·매사추세츠공대(MIT)·컬럼비아·UC 버클리 등 7개의 미국 대학을 돌며 한국 유학생들을 인터뷰했다. 대부분 대원외고·민족사관고·서울과학고 출신의 학부 유학생이었다.

 새삼 4년 전 글을 들추게 된 것은 KAIST 사태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를 생각하다가 이를 떠올렸다. 글 앞 부분에 있는 ‘획일적’이라는 단어를 보는 순간 KAIST의 ‘모든 수업 영어 강의’가 떠올랐다. ‘창의성과 리더십’이라는 표현에는 서남표 총장의 ‘소방 호스’ 발언이 오버랩됐다. KAIST가 전적으로 획일적이며 창의성과 리더십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얘기는 아니다. 훌륭한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외국으로 가야 한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단지 세계 일류가 되겠다는 야심에 중요한 교육적 요소들이 가려지는 일이 KAIST에서 일어난 것 아닌지를 걱정할 뿐이다.

 미국에서 유학생들을 만났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부분 자신감·기대감 등의 뭔가 벅찬 감정에 충만해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공부 잘해 세계적 명문대에 입학했고, 미래를 보장받았다는 생각에 근거를 둔 것은 아니었다. 역사와 철학 수업에 빠져 있던 스탠퍼드 공대생은 “세상을 보는 방법을 깨달아 간다는 희열을 맛보고 있다”고 했다. 이 학교는 공대생들도 인문학 강의를 많이 듣기로 유명하다. 인터뷰 직전 학교에서 벌어진 버락 오바마 대통령(당시에는 대선 후보)과 학생들의 ‘맞짱 토론’에 참석했던 예일대의 한국 학생은 “권위의 장벽이 없는 토론을 통해 나 나름의 사고 체계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서 총장이 주장하듯 미국 명문대생의 학습량은 많았다. 수업 준비를 위해 읽어야 하는 책의 분량이 상당했다. 하지만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말하는 미국 수업의 핵심은 그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자신감을 키워간다는 데 있어 보였다. 프린스턴의 한국인 교수는 이렇게 얘기했다. “수업의 목적은 지식의 전수가 아니라 기존 지식의 지평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불어넣어 주는 데 있다.” 이 말은 ‘기 죽이기 위해’가 아니라 ‘기 살려 주기 위해’ 공부시킨다는 것으로 들렸다.

 KAIST 학생들, 자질과 역량 면에서 미국 명문대생 못지않다고 믿는다. 문제는 유례없는 속도로 산업화·민주화를 이룬 기성 세대의 조급증에 있었던 것 같다. ‘교육 일류화’라는 새 도전 과제를 놓고 허둥대다 ‘인재들 기 살리기’라는 명품 교육의 핵심을 놓친 것, 이게 사태의 본질인 듯하다.

이상언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