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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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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한 세종 때의 명신 허성(許誠)은 평소 누군가 청탁을 해 오면 들어주기는커녕 원하는 내용의 반대로 처리하곤 했다. 예를 들어 전라도 쪽의 외직을 청탁받으면 평안도로 발령을 내버리는 식이었다.

 흥덕사의 승려 일운은 꾀가 많기로 유명했는데, 경남 산청의 단속사로 배치받고자 했으나 이조의 허락 없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에 일운은 이조판서 허성에게 “평양 영명사가 산수가 좋다 하니 가 있고 싶다. 단속사만은 피했으면 한다”고 청을 올렸고, 며칠 뒤 단속사로 가라는 통지가 떨어졌다. 일운은 크게 웃으며 “노적(老賊)이 내 꾀에 넘어갔다”고 했다. 『필원잡기』의 기록이다.

 사서에서는 흔히 청탁을 관절(關節)이나 분경(奔競)이라 일컫는다. 관절은 당나라 때 과거시험장에서 시험관이 잘 봐달라고 청탁을 받은 수험생의 답안에 기호를 붙여 구별했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고, 분경은 글자 그대로 세도가에게 앞다퉈 구름처럼 몰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리킨 말이다.

 개국 초 조선 왕조는 사회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청탁과의 전쟁’에 나섰다. 2대 정종이 등극 직후 내린 ‘분경 금지령’이 바로 그것이다. 핵심 내용은 ‘요직에 있는 사람은 공공장소가 아닌 곳에서 사사로이 사람을 만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특히 형벌을 취급하는 형조의 관원들은 3, 4촌의 가까운 친척이라도 해도 문병과 조문을 제외하면 아예 서로 방문하지 못하게 했다. 이를 위반했을 때에는 귀양은 물론 다시 벼슬에 나서지 못하게 하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세조와 성종 때 각각 ‘분경 금지가 너무 엄격해 미풍양속을 해치니 완화하라’는 영이 내려진 것을 보면 이 금지령은 제법 오랫동안 의미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글머리에 소개한 허성과 일운의 일화를 보듯 강직한 사람이 오히려 희화화되는 분위기도 분명 있었다. 결국 조선 후기로 가면서 국초의 엄정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국민권익위원회가 공무원들의 청렴도 향상을 위해 ‘청탁 거절법’을 책자로 만들어 배포할 예정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런 요청에는 이렇게 대처하라는 매뉴얼을 제시하겠다는 뜻이지만, 정말 쓸모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가령 위로부터의 청탁에도 걱정 없이 매뉴얼대로 실행이 가능할까. 청탁에 당당히 맞선 사람이 출세하는 사회 분위기가 먼저 만들어져야 하는 게 아닐까.

송원섭 JES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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