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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보다도 어려운 애들이 많대요” … 한 푼 두 푼 넣은 저금통 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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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땅끝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이 송호리 해변에서 활짝 웃고 있다. 아이들은 어려운 형편 가운데서도 연말마다 저금통을 통째로 기부해왔다. [해남=황정옥 기자]

“여까진 뭐 타고 왔다요?” “서울에서는 이마트에 맨날 갈 수 있어요?”

서울에서 손님이 왔다는 소식에 와글거리며 아이들이 모여든다. 두어 달에 한 번 2시간이나 차를 타고 목포시내 대형마트에 가는 걸 가장 신나하고, 연말 광주 시내 구경을 1년 내내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들. 서울에서 남쪽으로 1000리 떨어진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땅끝지역아동센터’의 아이들이다. 몸이 불편하거나 기초생활수급자인 아이들이 대부분인데 연말마다 저금통을 통째로 기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지난 4일, 남도의 끝은 이미 완연한 봄이었다.

송호리 해변이 바로 보이는 곳에 위치한 땅끝지역아동센터에는 그곳에서 숙식하는 7명을 포함, 49명의 아이들이 매일 부대끼며 지낸다. 2003년 방과 후 갈 곳 없는 아이들의 공부방으로 문을 열었고, 2007년 건물이 매각돼 길바닥으로 내몰릴 위기에 처했을 때 배우 문근영이 새 거처를 마련해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은 날씨가 좋은 날이면 학교까지 4km를 걸어가곤 한다. 그렇게 아낀 버스비 500원과 동전을 모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저금통을 기부했다. 17만원, 35만원 등, 40여명이 모은 돈 치고는 얼마 되지 않지만 이들에겐 1년을 꼬박 모은 돈이다.

아이들이 저금통을 채우기 시작한 건 5년 전부터다. 2006년 어린이날, 동네 문방구 주인이 일주일에 한끼씩 굶은 대신 아낀 돈 10만원을 센터에 보내왔다. 그 날 저녁 아이들이 둘러 앉아 통닭을 먹을 것인지 피자를 먹을 것인지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런데 결론은 통닭도 피자도 아닌 연탄이었다. 그 돈으로 불쌍한 할머니, 할아버지를 도와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선물 받은 10만원에 자신들이 연탄 한 장 값씩을 모아 보태기로 하고 시작한 저금통 채우기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저번엔 아저씨 무거운 짐, 아니, 그렇게 무겁진 않았는데, 아니, 그래도 무거운 거 들어주고 심부름값 받아서 500원 넣었어.” 지체장애 2급인 수미(18·여·송지종고 3)는 어눌하지만 제법 진지하게 설명했다. 부모님을 잃고 4년 전부터 센터에서 살고 있는 연지(18·여·송지종고 3)도 “근영이 언니가 집을 선물해 주고 많은 분들이 도와주신 것처럼, 우리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게 당연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땅끝 천사들은 고민이다. 1년을 꼬박 모아도 큰 금액을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해 기부를 거른 것도 좀더 큰 돈을 모아 더 의미있는 도움을 주고 싶어서였다. 최근 엄마가 태국 출신인 강물(10·여·송지초 4)이와 현주(8·송지초 2)의 얘기를 듣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경진(9·여·송지초 3)이는 “우리는 그래도 신발은 다 있는데 태국에는 맨발로 다니는 애들도 있대요. 우리가 도와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센터의 큰 오빠인 다헌(19·홈스쿨링)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우리가 저금한 100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지만 태국에서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들었다”며 “어차피 우리가 큰 돈은 못 모으니까 그런 외국 아이들을 도와줄 방법을 의논하고 있다”고 말했다.

땅끝지역아동센터에는 모두가 지켜야 하는 목표가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대학에 진학해 가난을 대물림 받지 않는 것, 최대한 빨리 기초수급을 벗어나는 것이다.

지난해 처음으로 일식(19·해양대 2)이를 비롯한 센터의 가장 큰 언니·오빠 8명이 대학생이 됐다. 올해 순천대에 진학한 연혁(19)이는 다른 인기학과에 갈 수 있는 성적이었지만 센터 동생들을 돌보기 위해 사회복지학과를 택했다. 이들에겐 소박한 바람이 있다. 졸업 후 땅끝으로 돌아와 동생들과 함께 사는 것. 수미처럼 장애가 있는 동생들이 평생 일하며 살 수 있도록 소도 키우고 농사도 지을 수 있기를 꿈꾼다.

글=해남=손지은 행복동행 기자
사진=해남=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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