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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에 숨은 미소년 아도니스를 아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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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성취: 성배의 환영을 보는 갤러해드 경, 보스 경, 퍼시벌 경(부분·1895∼96), 에드워드 번존스가 도안하고 모리스 공방이 생산한 태피스트리, 245×693㎝, 버밍엄미술관, 영국


4월이 되자 계속되는 일본발 방사능 사태 등 어두운 뉴스에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수식이 단골로 붙는다. T S 엘리엇(T S Eliot·1888~1965)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1922)의 첫 구절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엘리엇은 봄비가 잠든 식물 뿌리를 뒤흔드는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며, 망각의 눈(雪)으로 덮인 겨울이 차라리 따뜻하다고 했다. 왜일까? 얼어붙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자들에게 약동과 변혁을 일깨우는 봄의 정신이 숭고하면서도 잔인하기 때문인가? 51년 전 바로 이맘때 시민들을 4·19 혁명의 거리로 불러내 피를 요구했던 그 정신처럼 말이다.

아도니스의 죽음을 비탄하는 비너스(1768), 벤저민 웨스트(1738~1820)작, 캔버스에 유채, 162.6×176.5㎝, 카네기미술관, 피츠버그

총 5부 434행으로 된 이 난해한 작품에 실마리를 주는 것은 바로 황무지라는 제목과 그 밑에 붙은 짤막한 글이다. 고대 로마의 문인 페트로니우스의 글에서 따온 것으로, 라틴어로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쿠마에(이탈리아의 한 지명)의 무녀(巫女)가 항아리 속에 달려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소. 아이들이 무녀에게 ‘무엇을 원하냐’고 물으니 그녀는 ‘죽고 싶다’고 하더이다.”

 로마 신화에 따르면 이 무녀는 자신을 총애한 아폴로 신에게 한 주먹의 모래알 수처럼 긴 수명을 달라고 해 얻었으나 영원한 젊음을 요청하는 것을 그만 잊어버렸다. 따라서 한없이 늙어 가면서 죽지는 못했다.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그림1)에서는 이 무녀가 비록 늙었으나 남성 같은 우람한 근육에 힘과 위엄이 넘치는 모습이다. 그러나 페트로니우스의 이야기에서는 무녀가 종국에는 몸이 쪼그라들어 항아리에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살았지만 죽은 것과 같은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염원은 진짜로 죽는 것이었다-죽어야만 재생의 희망이 있기에.

쿠마에의 무녀(1510),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 작, 프레스코, 375×380㎝, 시스티나 경당, 바티칸

 엘리엇은 자신과 많은 현대인이 이런 삶 속의 죽음(Death in Life) 상태에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제1부 ‘죽은 자의 매장’에서 매일매일 아무 생각 없이 오전 9시 출근을 위해 런던 브리지를 넘어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단테의 『신곡』 ‘지옥’편의 죽은 자들의 행렬에 비유했다. 제2부 ‘체스 한 판’과 제3부 ‘불의 설교’에서는 공허한 일상, 특히 사랑과 재생산을 위한 성(性)이 아닌, 육욕만을 위한 습관적인 성에 빠져 있는 모습을 풍자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불모(不毛)의 ‘황무지’다. 그런 황무지 주민들에게 4월의 봄비와 꽃향기가 주는 자극은 잔인하다. 고통을 동반한 각성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황무지는 중세 아서왕 전설에서 원탁의 기사들이 찾는 성배(聖杯)가 숨겨진 곳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곳을 다스리는 어부왕(Fisher King)이 심각한 부상을 입어 병들면서 나라도 메마르고 황폐화됐다. 진정한 용기와 순결한 심신을 가진 기사만이 시험을 통과해 성배를 찾음으로써 왕과 나라를 불모에서 구할 수 있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화가 에드워드 번존스가 도안한 태피스트리(맨 위 그림)는 그러한 기사 갤러해드가 마침내 성배를 찾는 장면을 묘사했다. 엘리엇은 주석에서 자신의 시가 성배 이야기의 고대 기원을 다룬 인류학자 제시 웨스턴의 저서에 기초했다고 밝혔다.



 엘리엇은 또 제임스 프레이저의 유명한 신화·인류학 고전 『황금가지』(1890) 속 아도니스 이야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비너스 여신의 사랑을 받던 미소년 아도니스는 사냥 중에 멧돼지에게 받쳐 죽었다. 비너스의 슬픔이 너무 컸기 때문에 저승의 신들이 아도니스가 1년의 반은 저승에서 지내고 반은 이승에서 비너스와 지내도록 허락했다. 이렇게 저승과 이승을 왕복하는 아도니스는 프레이저에 따르면 매년 늦가을에 죽었다가 봄이면 소생하는 식물과 곡물의 상징이며 일종의 신이다. 고대인들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재현하는 의식을 함으로써 대지의 풍요를 기원했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아도니스가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모든 것이 정화되고 자연의 생명력은 싱싱하게 부활할 수 있다고 고대인은 믿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도 연결된다. 그래서 18세기 미국 화가 벤저민 웨스트의 작품(그림2)에서 아도니스의 시신을 잡고 비탄에 빠진 비너스의 모습은 묘하게 피에타의 도상을 닮았다.

 엘리엇도 부활을 위한 죽음의 필연성에 주목했다. 정신적으로 반쯤 죽은 채 계속 살아가는 것은 쿠마에 무녀의 쪼그라드는 삶과 다를 바 없다. 정신의 완전한 죽음과 부활, 즉 극도의 고통을 동반한 성찰과 기존 관념의 전복과 깨달음이 필요하다. 『황무지』 제4부 ‘익사’에서 이런 죽음이 이뤄진다. 그리고 제5부 ‘우레가 한 말’에서 화자(話者)는 마침내 메마른 땅에 비를 뿌려 줄 먹구름을 만나게 된다. 그때 먹구름의 천둥이 고대 인도의 철학서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진언(眞言)을 말한다. “다타!(주라)” “다야드밤!(교감하라)” “담야타!(절제하라)”라고. 화자가 진언을 따를 수 있는지 머뭇거리는 사이 희망과 불확실성의 상태에서 시는 끝난다. 우리는 어떤가. 이 진언을 따를 수 있는가? 무의미한 일상을 무관심하게 보내며 4월의 각성을 두려워하지는 않는가? 

문소영 기자

“황무지는 무의미한 인생에 대한 불평”
은행원 출신의 시인 엘리엇

20세기의 대표적 시인이자 평론가인 T S 엘리엇(사진)은 한때 은행원으로 근무했다. 『황무지』(1922)에는 그런 경험이 녹아 있어 금융과 무역업자에 대한 언급이 간혹 나온다. 그래서 이 시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사회의 물질문명을 비판하고 있다는 평론이 많다. 하지만 엘리엇 자신은 이 시가 개인적으로 무의미한 인생에 대한 불평이라고 했다. 또 『황무지』 제5부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여러 대도시의 붕괴를 언급해 정신적 황폐의 문제가 동시대에만 국한된 게 아님을 암시했다. 엘리엇은 『황무지』로 명성을 얻었고 영어시의 조류를 바꿔 놓으며 현대시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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