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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세력에 울려 퍼지는 백조의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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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

역사에는 거울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이 역사에 숨겨진 거울을 보고 오늘을 판단하고 내일을 준비한다. 그래서 실제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고 변화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정치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과거의 고질적인 정치행태가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우리 정치처럼 변화무쌍한 것도 없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표현이 실감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처럼 선거 때마다 정치인 물갈이가 심한 민주국가는 드물다. 3·11 대지진 수습에 임하는 일본 정치의 모습을 보면 우리 정치가 한결 생동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재스민 혁명을 겪고 있는 나라들에 내다 팔 수 있는 유망 수출 품목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주 국제회의에서 이런 생각을 말했다가 호된 반론에 직면했다. “예산안을 놓고 싸우지 않는 나라는 없다. 하지만 육박전을 벌이는 민주국가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연방정부가 폐쇄될 위기에서 백악관을 협상 무대로 예산안을 타결지은 오바마의 모습을 보면 우리 청와대가 초라하게 보인다. 어디 이뿐인가. 멈출 줄 모르는 청와대의 독주, 법치를 대체한 인치(人治), 정치를 대체한 관치(官治), 어김없이 등장하는 세무사찰, 그리고 마침내는 검찰공화국으로 전락하는 대한민국. 임기 4년차에 계속 되풀이되는 한국 정치의 현주소가 아니냐는 것이다.

사실 이런 우리 정치 현실을 걱정하는 것은 이들 전문가들만이 아니다. 여권(與圈)의 분위기도 별반 다른 것 같지 않다. 신공항 백지화, FTA 번역 오류, 전·월세난과 물가 폭등으로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연일 터져나오고 있다. 실제 FTA 번역 오류 등을 보면 무능과 무책임의 ‘각본 있는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영국의 한 외교관은 “외교관이란 외국에 나가서 국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런데 우리의 관리들은 어떤가. 다른 나라가 아니라 우리 국회와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하기 위해 국내에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닌가.

 어느 평론가는 여권에서 터져나오는 불만의 목소리가 ‘백조의 노래’처럼 들린다고 했다. 백조는 죽기 전에 한 번 꽥 하고 운다고 한다. 마치 집권세력이 죽기 전에 내는 울음소리 같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30%대로 곤두박질치고 민심이 심상치 않자 저마다 살길을 찾아 헤매는 백조들의 몸부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경쟁적으로 용비어천가를 불러대던 한나라당이 갑자기 대통령의 ‘탈당과 퇴진’을 거론하는 것을 보면 이 평론가의 말이 결코 기우만은 아닌 듯하다. 대통령 임기 4년차에 되풀이되는 우리 정치의 자화상이다. 이런 백조의 노래에 여권은 천당과 지옥을 구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여권에서 들려오는 백조의 노랫소리는 이명박 정권만의 위기는 아니다. 우리 정치의 고질적 위기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정치판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천당은 상을 주고 훈장을 달아주는 곳이다. 여당은 천당이고 야당은 지옥이다. 그런데 이 한나라당이 훈장을 달아주기는커녕 야당이 해야 할 ‘지옥의 심판’까지 맡고 나선 모양새다. 이를 보고 야당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돌아올 업보에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들이 해야 할 지옥의 심판을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신의 역할을 저버린 천당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역할을 빼앗긴 지옥의 위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천당과 지옥, 여당과 야당으로 짜인 우리의 정치판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지금 4·27 재·보선에 나선 여야 후보들이 ‘나홀로’ 선거 운동을 펼치고 있는 모습을 보라. 내년 총선에서도 정당을 배제한 이런 나홀로 정치가 판친다면 그것은 민주정치의 위기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대통령 임기 4년차는 과거의 되풀이냐, 미래로의 도약이냐를 판가름할 길목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CEO 통치관에 매몰된 정부가 아니다. 국민적 동의를 바탕으로 정책을 형성하고 집행하는 그런 정부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런 정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시 역사가 기회를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정말 우리에게는 백조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 정치의 ‘거울’을 역사에 남길 역량이 없단 말인가.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