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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탈세 통로 끊기나” … 전 세계 부자들 떨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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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해운사 A회장의 역외탈세를 조사해온 국세청 관계자는 11일 “우리도 놀랐다”고 했다. 짐작만 해오던 ‘탈세의 세계화’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이번 사건을 통해 깨달았다는 얘기다. 국세청의 역외탈세 추적이 앞으로 더 강도 높게 진행될 것임을 예고하는 말이기도 하다.

 역외탈세와의 전쟁은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 금융의 디지털화가 급속히 진행되며 국경을 가로지르는 돈이 급속히 늘었다. 탈세 목적의 자본 유출입과 투자도 당연히 증가했다. 미국만 해도 연간 역외탈세 규모를 약 1000억 달러로 추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각국 과세당국은 ‘국경’이라는 울타리를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를 바꾼 건 글로벌 금융위기다. 각국이 재정난으로 휘청이는 와중에서 리히텐슈타인LGT·UBS·HSBC 등에서 잇따라 외국인 계좌 은닉 사건이 발생했다. 조세피난처(tax heaven)를 통한 과도한 차입과 투자가 금융위기의 원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최근 각국이 국제 공조와 인력·조직 강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역외탈세 추적에 나서는 이유다.

 미국 국세청(IRS)은 지난 9일 미국인의 해외 계좌에 대한 감시를 크게 강화한다고 밝혔다. IRS는 이날 공개한 새 가이드라인에서 50만 달러 이상을 예치한 미국인 VIP 고객에 대한 외국은행의 관리 책임을 명문화했다. 외국은행은 앞으로 미국인 VIP 고객에 관한 정보를 의무적으로 IRS에 보고해야 한다. 심지어 독일·프랑스 정부는 스위스계 은행 직원이 훔친 정보를 돈을 주고 사들인 뒤 이를 근거로 탈세 추적에 나서는 ‘이에는 이’ 방식까지 불사하고 있다.

 한국 국세청이 올해부터 고액 자산가와 대기업의 역외탈세에 초점을 맞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만큼 국내에서도 역외탈세가 많아졌다는 방증이다. 국세청은 지난해에만 신고하지 않은 해외 소득 6224억원을 찾아내 3392억원을 추징했다. 올해엔 이 금액이 1조원을 훨씬 넘을 전망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국내에선 세원관리 체계가 상당히 갖춰져 구조적 탈세가 불가능해졌다”며 “탈세 규모가 큰 사람은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역외탈세를 돕는 건 두 가지다. 먼저 파생상품 등 첨단 금융기법이다. 단순 송금이라면 쉽게 잡아낼 수 있지만, 투자 형태로 나가므로 탈세를 목적으로 한 건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둘째는 전문가들의 도움이다. 국내에 살고 있는 개인이 직접 해외 조세피난처에 계좌를 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은행 프라이빗뱅커(PB)나 법무법인, 회계법인의 도움 없인 어려운 일이다. 파생상품과 전문가를 겨냥한 국세청의 안테나가 높아지고 있다.

 기업과 고액 자산가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국세청의 레이더가 해외까지 뻗어나가며 숨을 곳이 사라지고 있다. 국세청은 이미 미국 등 주요국과 상호 조사협정을 맺었다. 지난해 스위스와 맺은 조세협약은 국회 비준동의를 기다리고 있다. 스위스는 국내에서도 ‘검은돈’의 주요 피난처로 지적받고 있는 나라다. 6월부터 실시되는 해외 금융계좌신고제도 큰 압박이다. 잔고 10억원을 넘는 계좌는 모두 신고해야 한다. 신고를 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 처분에 더해 세무조사를 받을 수 있다.

 기업과 고액 자산가의 범위도 관심사다. 국세청은 “특정 범위를 한정하는 게 아니라 역외탈세를 주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 표현”이라고 밝혔다. 대재산가는 돈 많은 중소기업 사장, 금융이나 부동산 자산이 많은 이들로 상속받거나 자수성가한 사람들이고, 대기업은 해외 자회사를 이용해 해외수익을 빼돌리거나 탈세할 만한 규모가 되는 회사라는 것이다. 국세청은 이들 중에서도 고액 자산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국세청 관계자는 “대기업의 해외 거래 조사는 예전부터 해오던 것이라 특별히 더할 것이 없다”고 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조사를 해보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중간영역에 있는 사람들, 즉 중견기업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재산 빼돌리기가 의외로 많다”며 “상속세 때문에 딜레마에 빠져 역외탈세의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나현철·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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