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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원 자산 해운업자 ‘유령 인간’ 행각 … 재산도 경영도 다른 사람 이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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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해운업을 하는 A회장은 국내에서는 철저히 ‘유령 인간’으로 살았다. 선박 160척을 소유한 거부(巨富)지만 사는 집의 전세계약서까지 그는 친척 이름으로 작성했다. 아파트·상가·주식 같은 국내 재산은 모조리 해외의 페이퍼 컴퍼니로 명의를 이전해 놨다.

‘올해 1분기 역외탈세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는 김문수 국세청 차장. [연합뉴스]

그는 ‘회장님’으로 불렸지만 서울에 있는 회사의 대표이사도 맡지 않았다. 국내 사무실에서 하는 모든 경영활동은 휴대용 저장장치(USB)나 구두지시를 통해서만 이뤄졌다. 근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언론 노출 등 공개적인 활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심지어 세무 컨설팅조차 정보 유출을 우려해 홍콩 등 해외 회계법인을 이용했다. 그의 철저한 ‘신분 세탁’의 이유는 단순했다. 국내법상 과세가 어려운 ‘비거주자’로 위장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엄연히 국내에서 해운업을 하는 사업가였다. ‘탈세 전략’은 치밀했다. 국내에서 해운 사업을 하면서도 명목상 사업을 모두 외국 법인으로 옮겼다. 조세피난처인 바하마 등에 서류상 회사를 두고 이 회사가 해운업을 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조세피난처에 해운업체를 둔 것에 대해 과세당국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지자 그는 다시 홍콩에 해운회사를 설립했다. 경리직원만 있는 명목상 회사였고, 핵심적인 회사 업무는 여전히 국내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국내에서 이뤄진 거래 증빙자료는 즉각 홍콩으로 보내져 철저히 근거를 만들어놨다. 국내 회사와 홍콩 법인의 거래를 통해 이익은 홍콩법인으로 몰아줬다. 역외 소득에 대해 과세하지 않는 홍콩의 세금제도를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올해 신설된 국세청 역외탈세담당관과 조사국 국제조사과의 ‘칼날’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첩보를 입수한 국세청은 끈질긴 추적과 국제공조 등을 통해 A회장에게 4101억원의 세금을 추징하고 검찰에 고발했다. 국세청이 밝혀낸 역대 역외탈세 사례 중 최대 규모다. A회장은 이러한 방법으로 조성한 자금 수천억원을 스위스 은행을 비롯해 케이맨군도·홍콩 등의 해외 계좌에 보유하고 있었다. 그가 소유한 해운회사의 총자산은 10조원에 달하고, 개인자산만 1조원이 넘는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빼돌린 소득 중 일부를 외국인 투자로 가장해 다시 국내의 호텔과 공장에 투자하기도 했다. 국세청 박윤준 국제조세관리관은 “이번 사건은 비거주자로 위장하고 명목상 사업을 외국 법인으로 넘겨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세금을 납부하지 않은 고도의 지능적 역외 탈세”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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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세청이 이날 공개한 역외탈세 사례들은 부유층에 만연한 역외탈세가 갈수록 지능화·전문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계장치 수입업체를 운영하는 B씨는 사지도 않은 기계장치를 수입한 것처럼 장부를 조작해 매입원가를 부풀려 법인세를 탈루했다. 이 돈을 빼돌려 개인적으로 유용한 B씨에게 국세청은 174억원을 추징하고 검찰에 고발했다.

 합성수지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C씨는 홍콩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하고 이 법인에 실제 가격보다 싸게 수출했다. 홍콩법인은 이 물건을 제 가격을 받고 해외 거래처에 판매함으로써 국내 법인의 이익을 빨아들였다. C씨는 법인세 등 146억원을 추징당했다.

 D씨는 직접투자 신고 없이 해외법인을 설립한 후 이 법인 주식을 팔면서도 매각차익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내지 않았다. 매각자금은 다른 해외 주식을 사들이거나 자녀에게 증여하는 데 쓰였다. D씨는 양도세 등 64억원을 추징당했다.

 국세청 김문수 차장은 “역외탈세 행위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추적해 과세하고 조세범처벌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등 역외탈세 차단에 세정 역량을 집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윤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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