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j Global] “한국 드라마, 미국서 다시 만들 만하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12면

앨버트 김(45·한국명 우건). 그는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방송작가 중 한 명이다. 케이블 드라마 ‘더트(Dirt)’와 ‘레버리지(leverage)’로 연타석 홈런을 친 데 이어 아시아계 여배우 매기 큐 주연의 섹시한 액션 스릴러 ‘니키타(Nikita)’의 첫 시즌 대본도 이제 막 마무리 지었다. ‘니키타’부터는 작가뿐 아니라 제작자 역할까지 겸하고 있다. 이 역시 시작과 동시에 화제를 불러 모으며 대박을 쳤다. 하지만 6년여 전까지만 해도 방송작가가 될 그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는 잘나가는 기자였다. 15년간 미국의 유명 잡지들을 거쳤다. 스포츠 전문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최초의 아시안 기자였고, 엔터테인먼트 전문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의 창립 멤버였으며, 그 유명한 ‘피플’지의 부국장으로도 활약했다. 불혹을 목전에 둔 나이에 흔들림 없이 할리우드에 뛰어들어 기자에서 방송작가로, 다시 제작자로까지 변신을 거듭했다. 그 과정 속엔 불운도 행운도 있었다. 유명 TV 스튜디오들이 밀집해 있는 버뱅크에 위치한 ‘니키타’ 작업실에서 앨버트 김을 만났다.

글=LA중앙일보 이경민 기자
사진=LA중앙일보 신현식 기자

●기자로서의 경력이 화려했습니다.

“대학 시절 학보에서 일할 때 절 눈여겨보셨던 교수님의 소개로 잡지사에 글을 기고하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입사하게 됐죠. 당시만 해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아시안 기자가 한 명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워낙 스포츠 매니어였던 터라 7년간 정말 즐겁게 일했습니다. 올림픽, 월드시리즈 취재는 물론 스포츠계의 스테로이드 파문, 도박 문제, 마약 사건 등도 깊이 있게 다뤘죠.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출장이 너무 잦은 스포츠 기자 대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막 창간된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로 옮겨 잡지가 자리 잡기까지 6년여를 일했습니다. 돌아보면 그때 처음 할리우드 돌아가는 것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이후 ‘디테일’이란 잡지를 거쳐 다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서 일하다 ‘피플’지 부국장으로 옮겨 3년을 더 일했습니다.”

●유목민 같군요.

 “가끔 농담으로 제 자신이 ‘직업적 주의력 결핍 장애’(Career Attention Deficit Disorder)라고 할 만큼 한 직업에 금방 싫증을 느끼는 편인데, 그런 면에서 매번 새로운 사람을 만나 재미난 취재를 할 수 있는 기자직은 저에게 안성맞춤이었죠.”

●어릴 적 꿈도 기자였나요.

 “뉴욕에서 나고 자라 프린스턴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할 때까지만 해도 졸업 후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될 생각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죠(그의 아버지는 미국 디트로이트 헨리포드 병원 방사선 종양학과 책임자인 김재호 박사다). 학부를 졸업한 후 바로 의대에 들어가기보다는 1년쯤 휴식 기간을 갖고 세상 경험을 하려 했었는데, 그 사이 덜컥 기자 일을 하게 됐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제 결정을 존중해주셨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의대에 가겠지’라는 생각도 하셨었다고 훗날 말씀하시더군요.”

‘니키타’.

‘레버리지’.

●방송작가로의 전업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2005년 스포츠 채널 ESPN에서 ‘ESPN 할리우드’라는 데일리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을 만들 계획이라며 총책임을 맡아 달라고 제안해왔습니다. 제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에 있는 동안 할리우드 소식과 관련된 섹션을 기획해 만들었는데 그걸 눈여겨본 제작진이 비슷한 TV 프로그램을 만들어 달라고 한 거죠.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아주 좋은 조건, 높은 위치에서 TV 방송 일을 시작할 수 있는 데다 제 경력과도 잘 맞는 프로그램이란 생각에 LA로 이주해 프로그램을 맡아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사 오던 바로 그 주에 ESPN이 대대적 인사를 단행하며 경영진이 교체됐고, 그 과정에서 프로그램도 석 달 만에 폐지돼 버렸습니다. 2년이란 계약기간이 있긴 했지만 아무 할 일 없이 낯선 곳에 남겨진 느낌이었죠. 막막했어요.”

●다시 기자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 같은데요.

 “그랬죠. 그런데 마침 그때 커트니 콕스 주연의 ‘더트’라는 드라마에서 자문 역할을 의뢰했습니다. 잡지사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라 제가 조언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죠. 현장에선 어떤 용어를 쓰는지, 어떤 일이 일어날 법한지 등에 대해 알려주는 컨설팅을 하다 아예 대본을 쓰는 일에 같이 참여하자는 제안을 받게 되고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됐습니다. 그런데 또 마침 할리우드를 발칵 뒤집었던 작가들의 파업이 시작됐습니다. 모든 드라마가 올스톱되면서 다시 일을 잃게 됐죠. 다행히 파업이 마무리되면서 ‘레버리지’에 참여하게 됐고 3시즌을 성공적으로 끝냈습니다. 지난해 5월부터는 ‘니키타’ 작업을 시작해 이제 시즌 1의 스물두 개 에피소드를 마무리 지었죠. 한국에서도 ‘니키타’ 방송이 시작돼 반응이 좋다고 들었는데 아주 뿌듯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요.

 “할리우드가 은근히 나이에 민감한 곳입니다. 대학 갓 졸업한 스물셋 영화학도도 아니고, 늦은 나이에 작가 일을 시작하는 것에 대해 걱정이 많았었죠. 게다가 남들처럼 학창 시절 극작에 관한 수업을 들어본 경험조차 없었고요. 그래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구할 수 있는 대본들은 모두 구해 닥치는 대로 읽었죠. 드라마의 구조나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급했거든요. 각종 DVD를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보고 또 보고를 반복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 DVD들은 정말 ‘세상에서 제일 싼 필름 스쿨’이었어요. 노트를 펼쳐놓고 보면서 각 장면이 몇 분씩 이어지는지, 몇 명의 등장인물이 있는지, 배경은 어디인지 등을 꼼꼼히 기록하고 공부했죠. 지금도 계속 같은 방식으로 공부를 하고 있어요.”

●기자 경력도 도움이 됐나요.

 “기자 생활을 하며 쌓아 온 경험과 지식이 드라마를 쓰는 데 유용하게 이용된 적이 많아요. 필름 스쿨을 다니지는 않았지만, 돈을 주고 배울 수 없는 저만의 경험이 있었으니까요. 글을 쓰는 방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눈에 띄는 기사 첫머리를 써 왔던 느낌으로 매 에피소드의 오프닝을 썼고, 사람들에게서 재미난 요소들을 찾아내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었던 인터뷰 경험을 살려 드라마 캐릭터를 만들어냈죠. 주의 깊게 듣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자연스러운 대화나 용어를 잡아내 대본에 활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됐습니다.”

●새로운 일에 만족하십니까.

 “기자 일도 보람되고 즐거웠지만, 드라마를 쓸 때 느끼게 되는 기쁨은 정말 큽니다. 상상만으로 써 내려간 대본이 며칠 뒤 현실로 이루어져 영상으로 완성된 것을 보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회가 거듭되면서 캐릭터를 진화시키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죠. 기자로 일할 때도 많은 독자와 소통하긴 했지만, 드라마작가는 수많은 열혈 팬을 거느릴 수 있다는 점에서 더 신이 납니다. 피드백도 정말 빠르죠. 이젠 제작자로서 캐스팅이나 연출, 편집이나 음악까지 관여할 수 있다 보니 더 재미있습니다.”

●미국 드라마를 집필하는 과정은 한국과는 많이 다르다고 알고 있습니다.

 “미국 드라마는 공동 집필 방식입니다. ‘니키타’도 현재 8명이 함께 작업을 하죠. 작가실에 함께 모여 플롯을 구성한 다음 각자 흩어져 대본을 집필하는 식입니다. 에피소드마다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작품을 촬영 중인 토론토 현장에 가 상황을 체크하고 수정할 부분이 있으면 고치기도 합니다. 한국 드라마처럼 명확한 엔딩이 정해져 있는 구조라면 1~2명의 작가가 작품 전체를 집필하는 게 효과적일 수 있지만, 미국처럼 시즌이 거듭되는 시스템에서는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불어넣고 다양한 경험과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공동 집필 방식이 더 효율적이라고 봅니다.”

●한국 드라마도 자주 보십니까.

 “자주 보는 편입니다. 최근엔 ‘아테나’를 즐겨 봤습니다. 장모님께서 ‘니키타’랑 비슷한 부분이 있다며 추천해 주셨어요. 한국 드라마는 무엇보다 감정 표현에 탁월하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드라마를 본 후 기억하는 것은 시청하는 순간 느꼈던 감정뿐입니다. 그 때문에 정교한 플롯을 짜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보는 이의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요소들을 얼마나 잘 배치하는가의 문제입니다. 한국 드라마는 여기에 강합니다. 플롯상으로는 말이 안 되는 부분도 많지만 보는 이를 특정한 감정 상태로 순식간에 몰아넣는 솜씨만큼은 대단하죠.”

●한국 드라마가 미국에서도 통할까요.

 “문화적 차이가 여전히 문제입니다. 특히 결혼에 대한 사고방식, 연애관계에 있어 남녀 간의 소통 방식 등에서 차이가 많이 납니다. 미국인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요. 이런 부분만 잘 다듬으면 미국에서 리메이크될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실제로 저에게 유명 한국 드라마 몇 편을 가져와 리메이크 가능성을 타진한 프로듀서도 있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미국 TV 드라마에 보다 많은 다양성을 부여하고 싶습니다. ‘니키타’에도 아시아계 매기 큐를 캐스팅한 것처럼 보다 많은 아시아계 배우, 한인 배우에게 기회를 줄 계획입니다. 배우뿐 아니라 카메라 밖 제작 분야로도 많은 한인이 진출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후진들을 위한 교육에도 앞장서고 싶습니다.”

●방송작가를 지망하는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요.

 “저에게 방송작가가 되는 길을 묻는 학생이 많아요. 방송계 입문 과정이 남들과 너무 다른 데다 저 같은 케이스가 다시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많은 조언을 해주진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손에 잡히는 대로 무엇이든 열심히 읽고, 귀를 열어 사람들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듣는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