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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소설의 기틀 마련한 ‘문단의 어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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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호 09면

서울 종로구 평창동(128-1)에는 전통 한옥의 특징적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한옥 한 채가 은은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한국문학 제1세대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월탄 박종화가 말년의 5년 남짓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곳이다. 본래 이 한옥은 오랜 세월 종로구 충신동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다가 1975년 평창동에 옮겨져 원형 그대로 복원됐고, 2004년 9월 정부에 의해 등록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됐다. 그래서 거의 평생을 똑같은 집에서 살았던 박종화의 숨결과 흔적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 1980년대 <3> ‘제1세대 마지막 문인’ 박종화(1901~81)

정치적 혼란이 극심하던 81년 1월 13일 80세의 나이로 타계한 박종화는 8·15 광복 이후 줄곧 문단의 정점이었다. 문단에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의 말 한마디는 결정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했다. 매년 설날만 되면 그 한옥에는 ‘최고의 어른’에게 새해인사를 드리려는 문단의 세배객이 줄을 이었다. 한복을 차려입고 좌정해 세배를 받는 그의 모습은 ‘5척 단구’임에도 늘 바위처럼 무거웠고 위엄이 있었다. 하지만 세배 술을 건네며 환한 웃음으로 덕담과 격려를 나누는 모습은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자애로운 모습이기도 했다. 이런 월탄의 풍모를 후배 소설가이자 평론가며 젊은 시절 동인 활동을 함께했던 팔봉 김기진은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월탄은 따뜻하고 부드러우며 순하고 진중하다. 극단을 싫어하고 중용을 즐겨한다. 그런가 하면 늘 쾌활하고 명랑하여 사람들을 편안하게 한다.”

꼭 80년에 걸친 박종화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와 같은 품성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20세기에 막 들어선 1901년 서울의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박종화는 어릴 때부터 10여 년간 집에서 한학만을 공부한 뒤 소학교를 거치지 않고 바로 휘문의숙에 입학한다. 후에 역사소설에 몰두하게 된 것은 어렸을 때 배운 한학의 영향이 컸다. 휘문의숙을 졸업하면서부터 문학을 시작한 박종화는 처음에는 주로 시와 평론을 썼다. ‘장미촌’ ‘백조’ 등의 동인활동에 참여하면서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해 많은 문인과 교유의 폭을 넓혔다. 일제 치하 모두가 궁핍하던 시절 그의 집안이 비교적 넉넉했던 덕으로 그는 늘 문우들의 모임에서 중심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 때문인지 문인들의 술자리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많았다. 30년대 40년대의 술꾼 문인들은 한번 시작했다 하면 10여 시간씩 마시는 게 보통이었다. 주로 남대문에서 시작해 동대문까지 거의 모든 술집을 순례하며 마셨다는 것이다. 그 무렵 최고의 술꾼은 염상섭이었다. 박종화도 그에게는 약간 못 미치지만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고 대작했다는 것으로 봐서 상당한 술꾼이었던 것 같다. 주량도 세고 술값도 잘 내는 데다 주도(酒道) 또한 흐트러짐이 없으니 술자리에서 늘 인기를 독차지한 것은 당연했을 게다. 후배 소설가 정비석은 술자리에서의 박종화의 모습을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월탄은 평소에는 무척 온화하지만 취기가 어리어 오시면 뇌락(磊落·마음이 활달해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음)하신 기질이 점점 노출되어서 주연의 분위기를 어느새 호탕하게 만들어 놓으신다. 그리하여 고좌(高座)에서 추상같은 호령도 하시고 때로는 저좌에서 자애롭게 달래기도 하시는데 그 어느 행위에나 멋이 들어 있어서 주석을 분방하게 이끌어 나가시는 것이었다… 월탄이야말로 한국 고유의 주도가 몸에 배어 있는 어른인지 모른다.”

박종화의 이 같은 기질이 광복 이후 줄곧 최고 지도자로서 문단을 이끌어가는 데 적잖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젊었을 때의 그는 가까운 문우였던 김기진·박영희 등의 영향으로 한때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 이념이나 구호를 내세우는 문학보다는 민족을 생각하는 문학만이 진정한 문학’이라는 신념으로 민족문학의 정립에 앞장섰다. 일제 치하에서 수많은 문인이 ‘친일문학’에 나섰을 때도 은거하면서 자중했고, 특히 광복 이후 좌우 문단의 극단적인 대립에서 상당수의 좌익 문인이 그에게서 영향을 받아 우익으로 돌아선 것도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이다. 이승만 정권에서 유신 시절에 이르기까지 그가 한국문학가협회 회장·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을 지내면서 줄곧 문단의 정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와 같은 행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쌓여가는 나이는 어쩔 수 없었던 듯 사실상 문단 권력의 상징인 문인협회 이사장직에서 자의가 아닌 타의로 물러나게 된다. 박종화가 칠순을 맞게 되는 1970년 1월의 문협 정기총회에서의 일이다. 오래전부터 김동리·서정주·조연현 등이 ‘포스트 박종화’를 준비해 왔으나 박종화가 물러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이때 나선 사람들이 그들 제2세대를 강력하게 지지하던 마흔 살 안팎의 젊은 문인들이었다. 그들은 ‘이젠 그만 쉬실 때도 되지 않았느냐’며 박종화를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한참 생각에 잠겼던 박종화는 마침내 용퇴를 선언했다. ‘무혈 쿠데타’인 셈이었다.

비록 문단 권력의 정상에서 물러나기는 했지만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예총 회장 자리를 지키면서 여전히 문단 ‘최고의 어른’으로 대접받았다. 그의 가장 큰 문학적 업적은 우리나라 역사소설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이었다. ‘민족과 역사를 떠난 문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1923년 역사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목매이는 여자’를 발표한 박종화는 그후 세종대왕·이순신·대원군 등 역사상의 중요한 인물들을 다룬 작품들을 잇따라 내놓았다. 그 하나하나는 모두 역사소설의 전범이었고 귀감이었다. 또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편역한 ‘월탄 삼국지’는 후에 나오는 수많은 ‘삼국지’의 모델 역할을 했다. 그는 희수(喜壽)에 이른 77년까지도 신문에 소설 ‘세종대왕’을 연재하고 있었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197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 속 풍경, 풍경 속 사람들』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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