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를 어이할까'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구는 물과 공기가 있어 생명체가 존재해 왔다. 사람도 그 수많은 생명체 중의 하나로 몇 만년 동안 살아오면서 자신들의 쾌적하고 안락한 생활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각처에서 독특한 생활방식을 마련해 왔다. 이것이 문화이다.

그런데 지구상의 어느 곳도 서로 똑같은 기후와 풍토를 가진 곳이 없기 때문에 문화 역시 똑같은 문화가 존재할 수 없었다. 열대지역과 온대지역 및 한대지역에서 각각 쾌적하고 안락한 생활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방법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해양이나 사막지역 및 산악이나 평야지역에서 각기 쾌적하고 안락한 생활환경을 조성하는 수단이 서로 달라야했기 때문이다.

어디 이뿐이랴! 산의 높낮이, 평야의 넓이와 생김새, 강의 크기나 흐름새, 강우량의 다과와 시기, 기온의 변화 여부, 이런 하고 많은 요인들이 지구상 모든 지역의 생활환경을 서로 다르게 만들고 있으니 각처에서 일어난 문화가 천차만별의 차별상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각처에서 백천 가지 꽃이 제각기 피어나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우리문화도 그렇게 피어난 한 종류의 꽃처럼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일궈낸 독특한 문화이다. 서기전 2333년을 단군(檀君)기원으로 삼고 있어 반만년 가까운 문화전통을 자랑한다지만 우리가 역시 기록을 분명히 남기는 것은 서력기원을 전후한 삼국시대부터이니 우리에게도 서기 2000년은 문화적인 한 매듭을 지을만한 시점이라 할수 있겠다.

더구나 삼국의 출현은 우리에게 있어서 최초의 외래문화 충격인 한(漢)문화의 유입결과였다고 보아야 하니 우리 문화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외래문화를 흡수하여 세계성을 띠어가는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4세기 후반 경에는 불교를 통해 인도문화의 영향을 다시 받게 되어 우리 전통문화의 질적 향상은 더욱 증폭되는데 유교이념을 근간으로 하는 한문화의 충격을 받은 지 거의 5백년만의 일이었다.

삼국시대 후반기인 6세기경부터 불교를 자기화하기 시작한 우리 민족은 불교이념으로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치는 근 8백여년을 살면서 불교를 철저하게 우리 고유이념으로 심화 토착화시켜 이를 바탕으로 수준높은 우리 고유문화를 일구어 왔다.

그리고 나서 다시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이념을 받아들여 이 역시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이념으로 심화발전시킴으로써 이 이념을 기반으로 진경(眞景)문화라는 고유색 짙은 조선 특유의 문화를 이룩하여 전통문화의 맥을 굳건하게 지켜왔었다.

우선 문화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의(衣).식(食).주(住)를 우리 고유의 것으로 지켜오면서 우리가 가장 쾌적하고 안락하게 느낄 수 있도록 이를 발전시켜 왔었고 문학은 물론 음악과 미술 등 예술분야에서도 우리 전통문화의 끈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난 세기말경 조선왕조가 목숨을 다할 만큼 노쇠해 있을 때, 상업문명으로 시작한 그리스 원류의 서구문화가 세계를 석권해 가는 중 거의 마지막으로 우리를 강타해왔다. 이미 증기기관과 전기의 발명 등으로 기계문명의 단초가 열려서 대량생산과 대량 수송 체계가 확보되었으므로 판매처 확보를 위해 세계를 분할해 가지려는 서구 열강의 길잡이가 된 일본이 서구문화를 등에 업고 조선을 멸망시키면서 우리에게 서구문화를 강요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 민족은 이런 외압에 의한 전통문화 단절을 단호히 거부하며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존심을 내걸고 이를 굳건히 지켜내려 하였다. 그러나 서구식 학교제도에 따른 학력의 공인과 전통가치관에 대한 의도적인 부정으로 상층부의 전통문화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전통문화를 이끌던 상층부의 자부와 자긍심이 자책과 자괴로 돌변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전통문화의 명맥은 민중과 1500년 전통을 지켜온 불교교단에서만 굳건하게 지켜내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이도 오래가지 못하였다. 일제가 아시아 제패의 허황한 꿈을 안고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며 우리의 젊은이들을 전쟁마당으로 내몰면서부터 이들은 우리의 전통적 가치관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패망과 미.소에 의한 남북분단 및 한국전쟁은 더욱 이를 부채질하였다. 전통문화를 고수한다는 것은 곧 자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의무교육제도에 따른 서구식 학교 교육과 징병제에 의한 전시체제하의 군사교육은 모든 국민들로 하여금 서구식 가치관에 철저히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여기다 1960년대 군사혁명에 따른 새마을 사업과 1970년대의 산업사회로의 전환 정책은 농업사회가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가치 기준을 가차없이 파괴하여 반만년 문화민족의 문화 전통이 일시에 단절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각 지방의 명문가에 비장되던 조상전래의 문화 유산들이 휴지나 고물로 쏟아져 나와 폐기되거나 재생되는 수난을 겪고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으로 헐값에 팔려 나가기도 하였다. 전통문화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은 낙후의 상징으로 눈총받는 사회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전통문화의 흔적을 철저히 지워버리고 또 지워버리며 근대화의 성공에 축배를 들고 한강의 기적을 외쳐대며 스스로 역사가 없는 야만족임을 과시했었다.

이미 한글전용을 외치며 영어 교육에 치중하느라 우리 역사를 기록해 놓은 문자인 한문 교육을 강제 폐지하는 졸렬한 교육정책으로 최고 지식들이 문맹화(文盲化)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정을 자행하여 지식인들이 제나라 역사를 읽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으니 문화전통이 단절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우리 전통문화의 허물을 모두 벗어 내던져 버리고 철저하게 서구화하였다. 그런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까치가 검정칠 한다고 까마귀 되는 것은 아니다. 분별없는 모방에 자존심만 구겼다는 자괴감밖에 남은 것은 없다.

20세기가 저물어 가는 12월의 길목에서 낙엽지고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고목나무를 보며 우리 전통문화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공연한 감상일까. 지금 일각에서 일고 있는 전통문화 부흥 운동에 대한 희망을, 나는 오는 봄에 피어날 저 고목나무의 새싹으로 생각하고 싶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