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지금의 재앙, 일본 운명 가를 분수령”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후나바시 요이치

“대지진으로 일본은 두 갈래 기로에 섰다. 하나의 길은 일본의 재탄생(rebirth), 다른 길은 일본의 급격한 추락(free fall)이다. 일본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일본 열도는 지금 분수령의 순간을 맞이했다.”일본의 저명한 언론인·저술가인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67)의 진단이다. 일본 아사히신문 주필 및 워싱턴·베이징 특파원 등을 지낸 후나바시는 일본을 대표하는 지성이다. 그는 19일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3월 11일의 대지진은 일본 역사상 최대 위기”라 정의하며 “지진의 어둠이 걷히면 진짜 위기 상황이 닥쳐올 것이다. 일본의 정치 리더십이 역동적으로 이 위기를 헤쳐나갈 것인지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지진 후 일본에 대한 진단은.
“이번 지진은 가장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일본의 취약점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단순 자연재해가 아니다. 일본 전체의 운명을 결정지을 위기다. 일본이 안고 있는 노령화, 원자력 의존, 지역 소외 문제를 적나라하게 들춰냈다. 지진의 피해자 대부분이 노약자들이고, 후쿠시마 원전은 우리가 얼마나 치명타를 입었는지 보여주지 않는가. 여기에다 (구호 물품 등의) 운송 차질에선 지역 소외 문제를 엿볼 수 있다. 이번 지진은 일본 사회가 가진 전반적인 취약성에 현미경을 갖다 댄 셈이다.한마디로 일본은 지금 총체적 위기다. 일본을 리셋(reset)해야 한다. 리셋이 잘되면 일본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새롭게 탄생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일본은 급전직하할 거다. 세계 3위 경제 규모인 일본의 추락은 전 세계 위기로 이어질 것이 뻔하다.”

-지진 후 세계 속의 일본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이번 지진이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과 다른 점이 있다. 국제사회로부터 쏟아지는 격려다. 95년 지진은 일본만의 문제로 비춰졌지만 이번엔 세계인 모두가 움직였다. 한국·미국은 물론, 지난해 센카쿠 열도 문제로 분쟁이 있었던 중국까지 일본을 돕고 있다. 한국의 구조대는 신속하게 일본에 와주었고, 배용준씨 등이 보여준 우정은 일본인을 감동시켰다. 인터넷에서도 전 세계인들이 일본을 격려하고 있다. 이를 경험한 일본은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며 더욱 글로벌한 국가가 될 거라 기대한다.”

“한국 금 모으기 운동처럼 국민 의지 있으면 못할 게 없다”
-일본 지진 후 동북아 정세는 어떻게 보나.
“일본이 동북아 관계를 더욱 챙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중국과는 센카쿠 열도 등 껄끄러운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다고 해도 적어도 한·일 관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마음에 걸리는 점은 북한이 지진으로 경황이 없는 틈을 이용할 가능성이다. 최근 ‘우라늄도 6자회담에서 논의할 수 있다’고 북한이 나온 것을 보면 그런 우려는 더 커진다. 마침 다음 주면 천안함 사건 1주년인데, 북한은 아직 제대로 된 해명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대화를 위한 대화’를 하기 위해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이번 지진에서 우리는 핵 앞에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목도했다. 북한의 핵에 대해 더욱 조심성을 기울여야 한다.”

-일본 내 원자력 논란도 커질 텐데.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일본인이 핵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을 극복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현재 일본의 원자력 의존도는 40%에 달한다. 하지만 이번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향후 10년간 일본에서 원전 건설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핵에 대한 적개심을 극복해내기 위해선 또 시간이 걸릴 것이고, 일본 정부는 에너지 분야에 대한 정책을 완전히 새로 짜야 할 것이다.”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를 비롯한 많은 이가 이번 대지진을 두고 “전후 일본 최대 위기”라고 했는데.
“내가 느끼기엔 일본 역사상 최대의 위기다. 1944년생인 나는 패전 후 일본에서 자라며 일본이 어떻게 세계 속에서 강대국으로 일어서 왔는지 그 과정을 목도했다. 물론 지난 20년간 일본은 침체기를 겪었다. 하지만 이번 지진은 일본 사회 전체를 뒤흔들어놓았고, 일본이 가진 문제를 다 헤집어놓았다.”

-‘일본 리셋’을 위한 방법은.
“역동적 리더십이 열쇠다. 매일 원전 관련 새로운 위기가 닥치며 괴소문이 꼬리를 물고 있다. 혁신적 대처, 역동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정부를 비판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난 비관적이지 않다. 이번 사태에 대한 대처에서 정치인·관료가 보인 헌신과 협력은 오히려 꽤 인상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정치적 위기에 처한 간 총리는 물론, 2년 전 일본 역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뤄냈으나 많은 취약점을 드러낸 민주당으로서도 이번 위기의 파고를 잘 넘어야 한다. 한국인들이 1997년 금융위기 당시 금 모으기 운동으로 보여줬듯, 국민의 불굴의 의지가 있으면 못할 것도 없다. 당시 한국인의 의연한 모습을 보며 개인적으로 감동을 많이 받았던 기억을 요즘 많이 떠올리고 있다.”

-일본 국민의 차분한 대응 속에 남을 배려하는 ‘메이와쿠오 가케루나(迷惑を掛けるな·민폐 끼치지 마라)’ 문화가 한국에서도 화두가 됐다.
“메이와쿠 문화에 대한 과도한 칭찬은 개인적으론 불편하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일본인들의 DNA에만 있는 것도 아닐 테고, 어느 나라이건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한다면 당연히 그런 문화를 체화할 수 있다. 나는 오히려 일본인들의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모습에서 우려가 읽힌다. 이 크나 큰 재앙을 겪은 후 그렇게 차분할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운명이니 어쩔 수 없다’라는 체념과 포기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재앙을 겪은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힘 없이 무릎을 꿇는 운명론이 일본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운명론의 포로가 돼선 안 될 것이다.”

-지진으로 받은 개인적 영향이 있다면.
“나는 지진이 일어났을 때 도쿄 시내 한 호텔의 37층 스카이라운지에서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 타임스를 읽고 있었다. 그곳에서 곧 아내와 만나 대사관 리셉션에 가기로 돼 있었다. 어느 순간 건물이 흔들린다 싶더니 벽에 진열된 병들이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엘리베이터도 멈춰 37층에서부터 걸어 내려왔다. 하지만 다행히 운이 좋았다. 호텔 바로 옆에서 대피 중이던 아내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대중교통이 마비된 상황의 귀갓길은 괴로웠다. 그러나 가족과 친구들이 큰 해를 입지 않은 건 감사한 일이다. 이후 지진 소식을 접하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