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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 발전기 모두 바다쪽에 설치해 ‘원전 위기’ 불렀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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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호 04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반세기 이상 일본인들이 믿어온 원자력 안전신화가 붕괴됐다. 완벽한 내진 설계와 겹겹의 안전 장치로 일본의 원자로는 그 어떤 지진에도 끄떡없으리라던 믿음이 무너진 것이다. 이번 사고로 각국이 원자력 안전 대책을 강화하고 원자력 추가 증설 계획을 재검토할 태세다. 사고 당사자인 일본은 말할 것도 없다. 지진과 원자력의 공생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지 이번 사고가 입증해 주었기 때문이다.

동일본 대지진 후쿠시마 사태로 드러난 원전 대국 일본의 허점

일본 지진학계의 권위자 모기 기요오(茂木淸夫) 전 도쿄대 교수가 강연회에서 애용하는 지도가 있다. 최근 100년 동안 규모 7.0 이상의 지진이 일어났던 곳, 바꿔 말해 앞으로도 대형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큰 곳과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지점을 한 장의 지도 위에 표시한 것이다.
모기 교수의 메시지는 간명하다. 전 세계 원자로의 대부분은 지진 활동이 없는 안정 지반 위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104기의 원자로를 가동 중인 미국의 경우 대부분 지진활동이 없는 중부와 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따금 지진이 일어나는 캘리포니아주에 몇 기의 원자로가 있긴 하지만 이 역시 활성단층지역을 피해 지반이 단단한 곳에 있다. 유일한 예외는 일본이다. 전 국토가 지진대에 속한 만큼 어쩔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정부·도쿄전력 “예상 밖” 타령만
그런 만큼 일본도 원자력 개발 초기 단계에서부터 내진 설계 기준을 나름대로 엄격하게 적용해 관동대지진(규모 7.3) 급의 지진을 견딜 수 있도록 했다. 이번에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 발전소의 원자로들도 모두 이 기준을 통과한 것이다. 하지만 쓰나미에 대한 대비가 미흡했다. 후쿠시마 원전은 5∼7m 파고의 쓰나미에 대비한 방파제 시설을 갖췄다. 하지만 이번 지진으로 후쿠시마 해안에는 10m 이상의 쓰나미가 밀려 왔다. 이로 인해 비상 전원장치가 모두 잠겼다. 그 바람에 냉각장치가 멈추고 방사능 유출로 이어졌다.

사고 이후 일본 정부 관계자나 도쿄전력 관계자는 이구동성으로 ‘소테가이(想定外, 예상 밖이란 뜻)’란 표현을 썼다. 예상을 뛰어넘는 거대 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과연 불가항력이었을까. 원자력 전문가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핵안전 전문가인 찰스 퍼거슨 미국과학자연맹(FAS) 회장은 “쓰나미란 단어가 원래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그 위험을 몰랐을 리 없을 텐데도 (쓰나미에 대비한) 비상용 백업 시스템이 미흡했다”고 지적했다. 후쿠시마 원자로 1호기의 설계에 참여한 오구라 시로(小創志郞)는 16일 기자회견에서 “설계 당시 (해일과 지진에 대한 인식이) 무지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보다 구체적인 허점이나 설계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매사추세츠공대(MIT) 원자핵공학 박사 출신인 저명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小前硏一)는 “통상 원자력 발전소에는 비상용 디젤 발전기 2대를 설치해 두는데 모두 작동이 안 된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비상 발전기 2대를 분산시켰어야 하는데 모두 바다 쪽에 설치해 화를 불렀을 것이란 지적이다.

후쿠시마 원전 이외의 다른 원자력 발전소들 중에도 지진이나 쓰나미에 취약한 곳이 있다는 지적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시즈오카현의 하마오카(濱岡) 원전이다. 앞으로 수십 년 안에 일어날 것이란 경고가 끊이지 않는 예상 규모 8.0 이상의 도카이(東海) 대지진의 진원지 범위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원전 부지의 표고가 6∼8m에 지나지 않아 쓰나미에 취약하다는 비판이 높다.

그 때문에 모기 교수를 비롯한 지진학자들과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교세라 명예회장, 철학자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 교수 등 일본의 지식인과 재계 인사들이 즉각적인 가동 중지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밖에 고속증식로가 설치된 후쿠이현의 원자력 발전소도 설계 당시의 지반조사와는 달리 규모 7의 지진 위험대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2007년 발생한 규모 6.6의 니가타 지진 때에는 가리와(刈羽) 원자력 발전소에서 원자로가 자동 중지된 가운데 화재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후쿠시마 사고와는 달리 냉각 시스템이 정지되지 않아 방사능 유출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일본 국내뿐 아니라 2008년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해서도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나 원자력계가 그런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흔적은 없다. 2004년 11월 일본의 원자력안전기반기구는 3곳의 원자력 발전소를 대상으로 지진에 따른 방사능 유출 위험도를 조사했다. 결과는 “향후 40년 동안 지진에 의해 스리마일 사고와 같이 심각한 방사능 유출 사고가 일어날 확률은 최고 2%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2%의 확률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대비책을 강구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은 54기의 상업용 원자로를 가동 중인 세계 3위의 원자력 대국이다. 1950년대 중반에 시작된 일본의 원자력 개발 역사는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의 발자취와 일치한다. 그런 일본의 원자력 정책은 이번 후쿠시마 사고로 인해 큰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다. 현재 전력 총량 가운데 원자력에 의존하는 비율이 30% 수준인데 이를 2030년까지 49%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은 원활한 추진이 힘들어졌다. 이는 화석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려는 일본판 ‘녹색 저탄소 성장’ 계획이다.

원전 추가 건설 백지화 위기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 자민당 총재는 17일 “원전의 추가 건설이 어렵게 됐다”고 했다. 원전 추가 건설이 아무리 필요하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이를 추진할 동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추가 건설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생생히 지켜본 일본 국민의 저항에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논란의 표적이 되고 있는 하마오카 원자력 발전소 관계자도 “2015년으로 예정된 6호기 증설 계획을 재검토할 것”이란 뜻을 밝혔다. 오마에 겐이치는 “일본의 원자력 개발은 사실상 끝났다”고까지 말했다. 원자로 증설은커녕 후쿠시마 원전처럼 노후화된 기존 원전마저 가동을 중지하라는 여론으로 인해 원전의 가동을 중지해야만 하는 상황도 올지 모른다고 전망했다. 그렇게 될 경우 “일본의 (남아도는) 원자력 기술자들은 남은 원자로의 안전운전에 종사하거나, 중국 등으로 가서 생계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그렇다고 에너지·자원 빈곤 국가인 일본이 원자력 발전을 포기할 수도 없다. 제조업을 축으로 한 일본의 경제 성장은 안정적 에너지 공급을 떼어놓고는 생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본의 딜레마는 점점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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