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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삶을 설계하는 건축가’ 정기용씨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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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기적의 도서관’ ‘무주 프로젝트’의 건축가 정기용(성균관대 석좌교수·기용건축 대표·사진)씨가 11일 오전 11시 40분 서울 명륜동 자택서 별세했다. 66세. 정씨는 2005년부터 대장암으로 투병 중이었다.

 고인은 “건축가는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설계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왔다. 기후·풍토·풍경,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교감하는 건축을 펼쳤다. 건축의 사회성·공공성을 앞세웠 다.

  정씨의 대표작은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다. 2003년부터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상임대표 도정일)과 함께해왔다. 창의적인 어린이 전용 도서관을 짓는다는 목표 아래 제 1호인 순천 기적의 도서관(2003년 11월 3일 개관)을 비롯해 진해·제주·서귀포·정읍·김해 여섯 곳에 세워졌다. ‘도서관을 이렇게 지을 수도 있구나’라는 호평을 받았다.

고 정기용씨가 2003년 설계한 순천 기적의 도서관 내부. 크고 멋있는 도서관이 아니라 ‘아이들이 행복한 도서관’을 목표로 했다. [사진=현실문화]

 고인이 설계한 도서관은 엄숙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자율성을 최대한 배려한, 체험하는 도서관이었다. 또 복합문화공간이었다. 아이들은 독후감을 발표하고, 전시회도 열었다. 동화책을 읽을 때는 엎드려서도, 앉아서도, 책상에서도 보았다. 그는 저서『기적의 도서관』에서 “새로운 건축을 위해 해야 할 일은 근원적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사회를 꿈꿀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96년부터 2006년까지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마을회관·면사무소(주민자치센터)·군청·청소년수련관·공설납골당·버스정류장 등 을 디자인했다. 마을을 위압하는 랜드마크 타입의 건물과 거리가 멀었다.

 정씨와 ‘단짝’처럼 지내왔던 건축가 조성룡(67·성균관대 석좌교수)씨는 “우리 시대가 가장 필요로 하는 건축가였다. 우리는 아까운 사람을 잃었다. 땅과 건축을 대하는 고인은 항상 진지했으며, 그 중심에는 평범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애도를 표했다.

 후배 건축가들은 ‘저항의 건축가’에 방점을 찍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학과 이종호 교수는 “고인은 이 시대에 벌어지는 불합리함과 불의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먼저 내놓고 저항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71년 서울대 대학원 공예과를 졸업했다. 72년 프랑스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유학을 떠나 프랑스파리장식미술학교 실내건축과, 파리 제6대학 건축과, 파리 제8대학 도시계획과를 졸업했다. 75~85년 파리에서 건축 및 인테리어 사무실을 운영했으며, 86년 한국에서 기용건축을 설립했다. 2004년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커미셔너로도 활동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진주 동명중고등학교, 김제 지평선 중고등학교, 계원조형예술대, 영월 구인헌 등이 있다. 고인은 또 고 (故)노무현 전 대통령의 김해 봉화마을 사저를 설계했다. 지난해 11월 그의 건축세계를 집약한 전시 ‘감응(感應)’이 열리기도 했다.

저서로 『서울·건축·도시』 『서울 이야기』 『감응의 건축』 등이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희경(화가)씨와 아들 구노(건축가)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발인은 14일 오전 7시. 장지는 남양주시 모란공원. 02-2072-2018.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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