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자랑 ‘3원 3재’ 그림 봄나들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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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고산(孤山) 황기로(1521~67)의 ‘시고(詩稿) 4수’. 조선시대 초서의 최고 명필로 꼽혔던 고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요즘 미술계에서 고서화(古書畵) 전시를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간송미술관의 봄·가을 정기전이나 삼성미술관 리움의 고미술 전시 등을 빼고는 우리 옛 그림을 볼 기회가 드물었다. 상업화랑은 더하다. 고서화 수량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잦은 전란 속에 피난 가며 땅에 묻어놓을 수 있었던 도자와 경우가 다르다.

 서울 인사동 동산방화랑(대표 박우홍)에서 15~28일 열리는 ‘조선후기 회화전-옛 그림에의 향수’는 그런 점에서 눈길을 끈다. 1983년 ‘조선후기 회화전’을 열어 미술사학계에서 호평 받았던 동산방화랑이, 똑같은 주제로 28년 만에 여는 전시다. 이른바 조선시대 ‘3원3재’, 즉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관아재(觀我齋) 조영석과 추사(秋史) 김정희 등 내로라하는 조선 후기 작가 33명의 50여 점이 나온다. 80% 가량이 새롭게 공개되는 작품들이다.

탄은(灘隱) 이정(1541~1622)의 ‘니금세죽(泥金細竹)’. 아교에 금가루를 갠 니금이라는 재료를 썼다. 128ⅹ52㎝로 화폭이 크다. 잎과 줄기의 표현에 격조가 느껴지는 수작이다.

 전시작은 산수·인물·풍속·화조·사군자·서예 등을 포괄한다. 조선후기 회화의 면모를 두루 살필 수 있다. 1974년 개관 이후 동양화 전문화랑으로 명맥을 이어온 동산방 화랑의 저력이 드러났다는 평이다. 화랑을 창업한 박주환씨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소장가들이 적극 작품을 내놓았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대부분의 작품이 도록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라, 신작 전시회를 보듯 감동이 일어난다. 몇 편의 논문보다 더 많은 미술사 정보와 지식이 들어있다”고 평가했다. 또 “이를 계기로 화랑가에 고서화전이 더 많이 열리고, 우리 옛 그림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살아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탄은(灘隱) 이정의 ‘니금세죽(泥金細竹)’과 고산(孤山) 황기로의 ‘시고(詩稿)’ 4수다. 둘 다 임진왜란 이전의, 희귀적인 작품이다. ‘니금세죽’은 먹물 들인 비단에 아교에 금가루를 갠 니금으로 그린 대나무 그림이다. 위로 뻗어 올라가는 댓잎과 아래로 늘어진 댓잎의 대비되는 모습이 두 폭의 대형 화면에 담겼다. “탄은의 굳세면서도 능숙한 운필이 잘 살아난 명작”(유홍준)이란 평이다. 조선시대 초서 서예가로 이름을 날렸던 황기로의 ‘시고’ 4수는 얼마 전 보물(제1625-2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정선의 ‘부아암(負兒巖)’은 겸재가 북악산을 그릴 때 빼놓지 않았던,아기를 등에 업은 형상의 바위 그림이다. 겸재가 여러 차례 그린 바 있으나, 간결한 필치의 이 작품은 남근석의 이미지를 강조해 유머러스하다. 김홍도의 ‘어해도(魚蟹圖)’는 게 한 쌍의 움직임을 생동감 있게 포착했다. 일제시대 공개됐으나, 그 후로 실물이 나오기는 처음이다.

 인물·말 그림에 능했던 공재(恭齋) 윤두서의 ‘주감주마(酒酣走走馬), 표암(豹菴) 강세황의 산수도 ‘장송유혜도(長松幽蹊圖)’, 수운(峀雲) 유덕장의 ‘설죽도(雪竹圖)’는 화가의 전형적인 화풍을 보여준다. 화조(花鳥)와 기명절지(器皿折枝·그릇과 각종 화훼류)를 그려넣은 장승업의 ‘화조기명십곡병(花鳥器皿十曲屛)’, ‘평생 마음을 지키는 힘이 한 순간의 잘못된 생각을 막지 못하네 세상살이 삼십 년이 지나서야 공부한다는 것이 복임을 바로 알았네(平生操持力 不敵一念非 閱世三十年 方知學爲福)’라는 글귀를 써넣은 김정희의 선면(扇面·부채 거죽)도 빼놓을 수 없다. 당대 묵란도(墨蘭圖)의 라이벌이었던 흥선대원군 석파(石破) 이하응과 운미(芸楣) 민영익의 난 그림을 한자리에서 비교하는 즐거움도 있다. 02-733-5877.

양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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