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경영] 제 1화 멈추지 않는 자전거 54년 ⑬ 소아암 병동과 월드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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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1면

보령의 제대혈 은행인 ‘보령아이맘셀’.

2002년 6월은 월드컵 열기로 온 나라가 뜨거웠다. 나는 오래전부터 정기적으로 전국 주요 병원을 돌며 신약 개발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현장 의료인들과 대화를 나눠 왔다. 그해 내가 서울대병원 소아암병동을 찾았을 즈음에는 월드컵 예선에서 우리나라가 아주 잘 싸워 주고 있었다. 특히 6월 14일 그날은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우리나라와 포르투갈의 예선 마지막 경기가 열리는 중이었다. 대부분의 환자가 의료진과 어울려 병원 복도에서 응원전을 펼치고 있을 때니 내가 날을 잘못 잡은 것이다. 대신 내친김에 나도 뒷자리에 서서 경기를 지켜봤다.

 마침내 박지성 선수가 골을 넣자 병원이 떠나갈 듯 함성이 터졌고 나도 모처럼 일흔 나이를 잊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 유독 멍하니 휠체어에 앉아 있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TV를 보면서도 아무 반응이 없다니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나는 슬그머니 올렸던 양팔을 내리고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우리가 골 넣었는데 안 좋아?” 내 말에 아이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는 듯했다. 만사가 귀찮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때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신경외과 전문의 한 분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회장님, 소진이는 뇌에 암세포가 퍼져 눈이 안 보이고 거의 듣지도 못해요.” 그제야 사정을 안 나는 박지성의 골 세리머니까지 따라 하며 호들갑을 떤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아이의 귀에 대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소리로 말해 봤다. “박지성 선수가 골을 넣었어!” 그 말에 아이는 놀랍게도 빙그레 웃었다. 비록 머리 겹겹이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그 미소는 정말 맑고 밝았다.

 며칠 후 잘 아는 축구협회 임원 한 분께 부탁해 그 아이 선물을 마련했다. 박지성 선수의 사인이 있는 축구공이었다. 비록 보이지는 않겠지만 그 축구공을 받으면 소진이도 분명 기운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진이는 병원에 없었다. 포르투갈전이 끝난 이틀 뒤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다. 박지성 선수의 활약을, 우리나라의 월드컵 4강 기적을 끝내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풀썩 주저앉아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우리나라는 축구 강호들을 내리 제압하며 4강에 오르는 기적을 연출했지만 나는 나머지 경기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잠시 만났을 뿐인 소진이의 얼굴이 자꾸 어른거렸다. 그 해맑은 미소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보령제약과 한국암연구재단 공동으로 만든 보령암학술상 제1회 시상식 모습. 오른쪽에서 다섯번째가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그해 2002년 3월은 마침 보령제약이 국내 종양학 분야의 학술 활동을 진작시키고 암 연구 분야의 뛰어난 업적을 기리기 위해 보령암학술상을 제정해 처음 시상한 때였다. 이후 암 퇴치의 날을 앞당길 만한 우수한 연구 성과가 이어졌다. 그 성과들이 하나 둘 모이다 보면 분명 암을 정복할 수 있는 해법을 찾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왜 진작 암과 같은 난치병 퇴치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하지 않았는지 새삼 부끄러웠다.

 그때 그 후회스러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는 곧바로 제대혈사업을 시작했다. 탯줄에서 뽑아낸 조혈모세포는 난치병에 효과가 좋았다. 또 제대혈에 많이 분포돼 있는 조혈모세포를 추출해 특수 처리하면 나중에 치료약으로 쓸 수 있었다. 2003년에는 ‘가톨릭 조혈모세포 은행’과 제휴를 했고, 미국과 일본의 제대혈사업 실태를 파악한 뒤 영남대의료원 세포은행으로 제대혈사업을 확장했다. 그리고 이 사업에서 얻은 수익 가운데 적지 않은 금액을 어린이 난치병 환자를 위해 썼다.

 그해 월드컵이 끝나고 다시 소아암병동을 찾은 나는 소진이 대신 그 아이만 한 또래의 어린이 환자에게 박지성 선수의 사인볼을 선물했다. 4강 신화까지 이룬 터라 그 아이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소진이와 그 아이에게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난치병을 없애기 위해 죽는 날까지 헌신하겠노라고.

 2002년 월드컵에서 붉은악마는 이렇게 썼다. ‘꿈은 이루어진다’. 나는 믿고 있다. 난치병과의 전쟁을 계속하는 한, 내 꿈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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