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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에 〈해피 엔드〉를 꿈꾸는 자 누구인가?

중앙일보

입력

11일 개봉하는 두 한국영화, 〈세기말〉과 〈해피 엔드〉는 올해 계속되고 있는 한국영화의 강세를 연말에도 이어갈 수 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화제작들입니다.
두 영화가 화제가 된 데는 일차적으로 배우들(〈해피 엔드〉)과 감독(〈세기말〉)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현재(바로 세기말이라는 시점)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이 두 작품이 화제가 될 수 있는, 좀 더 본질적인 배경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두 영화는 바로 "세기말"이라는 현재시점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해피 엔드〉는 한 가족을 중심으로, 〈세기말〉은 감독의 관심사대로 우리 시대의 사람들(주로 지식인들)에 대한 이야기지요. 치정극이라는 선전이나 풍자 코미디 같은 인상에 현혹된다면 이들 영화가 가진 이러한 공통점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 두 영화는 본질적으로 암울합니다. 〈해피 엔드〉는 의도적으로 제목과 반대되는 방향에 서있고, 〈세기말〉은 마지막에 희망을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두 영화의 공통된 정서는 암울함, 우울함, 씁쓸함입니다.
이 영화들에 담긴 본질적인 정서에 대해 관객들이 어떻게 판단할 지는 미지수지만(또한 이 영화들의 형식이나 주제 면의 완성도에 대해), 어쨌든 관객들의 입장에서도 두 영화의 동질적인 정서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입니다.

1. 〈세기말〉

〈넘버 3〉에서 우리 사회에 대해 팽배한 일류의식에 대한 풍자를 날카롭지만, 그것을 통쾌한 웃음 속에 담아낸 송능한 감독. 그런 그이기에 이번 신작에 기대를 거는 영화 팬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이번 송능한 감독의 신작에도 전작처럼 독설적이고도 풍자적인 대사가 꽤 되지만, 대부분이 영화계 이면에 관계된 것이라 관객들이 전작처럼 보편적인 공감을 할 수 있을 지는 의문시됩니다.
송능한 감독은 오히려 전작에서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 즉 송강호를 통한 무대뽀와 헝그리 정신 같은 부차적인 요소들이 부각된 점이 거슬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영화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세기말〉은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모라토리움(지급 불능 상태)", "무도덕",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 혼란)"가 각각 단락의 제목이지요. 각 단락의 주인공도 자기가 싫어하는 멜로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 두섭(김갑수), 원조교제를 하는 여대생 소령(이재은), 바람둥이 시간강사 상우(차승원)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들은 서로 스쳐 지나가고 각 단락에서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러티브에 별 구애를 받지 않는 영화의 형식을 정해 놓고, 송능한 감독은 이 시대의 먹물(즉 지식인)에 대해, 이 나라의 천민 자본주의적 성격에 대해, 심지어 자신이 활동하는 영화판과 이를 둘러싼 비평계에 대해 냉소를 보내고 있습니다.
언뜻 보기에 이 냉소는 풍자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통쾌한 기분이 들게도 하지만, 궁극에 남는 것은 씁쓸함입니다. 송능한 감독 역시 세기말이라는 우울한 배경 속에 갇혀 희망적인 요소들을 찾아내고 있지는 못하니까요.
특히 두섭의 아내 희숙(정경순)의 입을 빈 시나리오 작가의 현실에 대한 지적은 굉장히 재미있지만, 역설적으로 씁쓸함을 한편에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섭의 비평계에 대한 독설은 더욱 더 냉소적으로 비춰지고 있지요.

이 시대의 천민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캐릭터 천을 맡은 이호재와 그리고 겉은 번드르르하지만 남는 것 없는(그래서 비관적인) 시간강사 상우를 맡은 차승원의 연기는 인상적입니다. 차승원의 경우는 기존에 그가 가진 귀공자 형 이미지를 뛰어 넘는 힘을 보여 주기도 하지요.
마지막 "Y2K" 단락에서 감독은 가수 한영애의 노래를 빌어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영화 내내 희망에 대한 구체적인 실마리 없이 냉소적인 감독의 진행과 비교되면서 오히려 도식적인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면은 비관적인 느낌을 강하게 합니다.

2. 〈해피 엔드〉

이 작품은 기승전결, 즉 정통 드라마의 내러티브 구조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해피 엔드〉를 만든 정지우 감독은 이미 단편영화로 인디펜던트 진영에서 주목을 받아 왔던 사람이고, 이것은 그의 데뷔작입니다.
그의 연출적 장점은 세심하고 꼼꼼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일상의 한 공간과 한 장면을 어떻게 영화의 본질적인 주제와 연결시키는가에 있어서는 재능을 갖고 있다는 사례로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데뷔작의 주인공들은 "비정상적인" 가정의 구성원입니다. 아내 보라(전도연)는 사업을 통해서 돈을 벌고, 남편 민기(최민식)는 실직한 은행원입니다. 고전적인 성역할이 바뀐만큼 감독도 그것을 강조하는 장면들을 여러차례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라가 자신이 진행하는 사업을 설명하는 장면이라든가, 민기가 빨래를 하고 영수증을 모으고 거기에 드라마를 보고 우는 장면까지. 이런 현실은 분명 IMF 이후 드러난 중산층 가족의 일탈된 모습의 한 예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불륜에 빠져 있습니다. 따스하다는 느낌이 들만큼 극히 밝은 화면에서 보라는 애인과 격렬한 정사를 벌이기 위해 찾아갑니다. 즉 불안은 어둡고 우울한 색조가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비주얼 안에서 진행됩니다.

본질적으로 〈해피 엔드〉는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정지우 감독의 명성을 굳힌 단편 〈생강〉에서 그는 과거 능동적인 사회적 삶을 살았던 여인이 아줌마로 전락한 과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것을 이 영화에서 기대했겠지만, 그는 이 아줌마의 자리에 실직한 남자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것은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조국통일 만세를 힘있게 읊조리던 최민식은 이제 소심한데다 일상의 구태의연한 냄새가 풀풀 나고 있습니다.

즉 영화 〈해피 엔드〉는 결혼한 여성의 행동 동선을 따라 가고는 있지만, 그 안에 놓여 있는 것은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의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가는, 궁극에 가서는 결국 그렇게 되고마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영화의 내용이 보편성을 획득하기에 무리가 있는 것이기에 감정이입을 할 여지는 많지 않습니다만, 영화적으로 본다면 남자들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입니다.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는 창문 밖으로 늦잠을 자다가 깨어난 민기가 공허하게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역설적입니다. 보통 자기 자식이 희망적인 암시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해피 엔드〉의 결말을 그렇지 않습니다.

3.
〈세기말〉과 〈해피 엔드〉, 두 영화는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전혀 다른 것이지만 바탕에 깔고 있는 정서는 비슷합니다. 오히려 희망을 강조하는 〈세기말〉이 좀 더 우울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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