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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해바라기'

중앙일보

입력

이번에는 'TV 속 세상' 얘기가 아니라 'TV 속 영화 속 세상' 얘기를 해야겠다. 이 말을 듣고 주말의 명화나 명절에 방영되는 앞뒤 마구 잘린 특선영화로 어림짐작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 〈TV영화 러브스토리〉를 말하는 것이다. 지난 1일 방영을 시작한, 송지나 작가와 이강훈·김종혁 PD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걸작이라는 소문이 방영 전부터 자자했던 SBS 〈러브스토리〉는 매주 다른 주제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계획이라고 한다.

TV영화의 첫 테이프를 끊은 '해바라기'는 스토커에 관한 얘기다. 이렇게 한 문장으로 '해바라기'의 내용을 확 줄여버리고 나니 왠지 맘이 허전하다. 스토커에 관한 얘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해바라기'는 스토커를 앞세워 사람들의 맘속에 숨어 있는 아픔과 고독감을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지독한 외로움과 집착을 너무도 적나라하게 드러내 순간순간 섬뜩함까지 느끼게 하는 '해바라기'는, 그러나 절대 공포영화가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영화였다.

줄거리만 보면 스토커에 방점이 찍혀 있는 듯 하지만 중요한 건 극중인물 승희와 태성이 타인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승희는 과거에 술취한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받고 이에 대한 분노와 강박관념으로 모든 남자에게 마음을 닫고 살아간다. 그리고 태성은 모든 여자는 창녀라고 여길만큼 삐뚤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를 만나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이 열고 있었다.

승희는 스토커에게 시달리는 자신의 생활을 얘기하며 태성을 의심하는 한편 태성에게 의지하기도 한다. 태성은 승희에게 호감을 갖고 그녀를 사랑하면서도 그녀가 자신에게 마음이 여는 것을 보면서 새삼 그녀도 다른 여자들과 다를 것 없는 속물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태성은 결국 끊임없이 그녀를 불안에 떨게 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녀를 지켜주려는 이중적인 모습을 가진 자신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의 어긋난 삶과 사랑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짚어내고 치료해줄 수 없다는 점에서 안타깝기만 하다. 세상은 인터넷이나 국제화다 해서 덩어리째 열리고 있지만 그 속에 자리잡은 사람들 하나하나는 자꾸 안으로 안으로 숨으려고만 하고 그래서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고뇌와 외사랑에 허덕이는 수많은 승희와 태성이 생겨나는 것이리라. 게다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서도 사랑을 드러내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이 또 있을까?

명쾌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태성이 스토커라는 사실이 이미 극 중반쯤이면 자명하게 드러나는 만큼 할리우드 영화 같은 엄청난 스릴과 공포를 보여줄 생각은 더더욱 없었던 듯하면서도 '해바라기'가 'TV영화'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것이 어쩐지 자연스럽다. 드라마에서 느껴지는 소소한 감상이 아니라 영화 한편을 본 것과 같은 진한 여운이 '해바라기'를 본 뒤 꽤 오랫동안 내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중 내내 배경음악으로 깔렸던 이 노래와 함께...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이 쉴 자리가 없고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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