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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 다큐멘터리-11] 이민자들 독립자금

미주중앙

입력

조국 광복을 조직적으로 후원한 애국단체중의 하나인 국민 부인회. 조국 광복을 위해서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었다.

◇독립자금이라면 아낌없이 바쳐

하와이나 멕시코로 떠난 초기 한국인들은 교육 수준이 낮았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60%이상이 교육을 받지 않은 무학자들 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농부를 모집해서 떠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육 수준이 낮았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 가운데서 지도자가 나와 직접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그들은 형용할 수 없는 가난함 속에서도 싫다하지 않고 아낌없이 독립 자금을 바쳤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친 돈이 없었다면 독립운동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먹는 것도 애국지사 위해 참아

양주은 옹의 얘기다.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된 뒤에는 북간도 서간도 등 각처에서 독립 운동하던 사람들이 상해로 모두 몰려들었거든. 그 사람들 중에는 임시정부 요원 이외에 학생들도 있었는데 군인 등을 포함해서 800여명이나 됐단 말이야. 그 당시 중국 땅에서는 중국사람들의 형편도 변변치 못했기 때문에 어디 가서 밥한 술도 제대로 얻어먹을 수가 없었지. 또 우리 나라에서는 돈을 보낼 수가 없었어. 왜냐하면 왜놈들이 알면 목을 베거든. 그러니 돈 나갈 데라고는 여기밖에 없었단 말이야. 그렇다고 여기 하와이에 재벌들이 있었나? 그저 월급인데 그 중에서 성심으로 얼마씩 보내주었지."

김구 선생이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 때문이었고 이승만 박사가 각국을 돌아다니며 우리의 입장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 때문이었다. 안창호 선생이 인재를 기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그들 때문이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세계를 누빌 때 아메리카의 초기 이민들은 피나는 노동을 했다. 그리고 그들은 끼니까지도 넘겼다. 먹고 싶은 것도 참았다.

◇매주 사흘 고기 안먹고 돈 모아

"애국단원은 한 주일에 두 날은 일본사람들의 간장을 안 먹기로 하고 또 3일은 고기 안 먹는 날로 해서 돈을 모은 것으로 상해임시정부에 1000 달러를 보냈습니다."

하와이의 초기 이민들보다 더 악조건 속에서 일한 사람들이 있다.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다. 그곳은 날씨부터가 달랐다. 낮에는 더워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벽 3시에 일어나 일해야 했다. 그렇다고 하와이보다 많은 임금을 받은 것도 아니다. 훨씬이라고 표현 할 만큼 적은 돈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도 독립 자금을 냈다.

멕시코 시티에서 살고 있었던 최병덕씨(77년 당시 72세)와 티후아나에서 살고 있는 김경우씨의 설명이다.

"월연금 매달마다 내는 세금이죠. 매달 몇 푼씩 내서 미국으로 보내고 메리다 지방회에 세금도 내고 또 학교가 있었습니다. 동포들이 학교를 창립했죠. 그 비용도 냈습니다."

"그때 거기 낸 영수증 하나를 봤는데 미국 돈으로 5달러 짜리였습니다. 그 당시 5달러 라면 큰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그때 멕시코 에네켄(어저귀) 농장에서 일했던 초기 한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돈은 정말 엄청난 돈이었을 것입니다."

◇자금 250만불 현 5000만달러

한일합병 이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아메리카의 한인 이민들은 무려 2백 50여만 달러(김원용은 3백만 달러라고 주장했다)라는 거액을 독립자금으로 바쳤다.

그 동안의 물가상승률 20배를 고려하면 5000만 달러라는 거액이 된다. 물론 이런 돈이 일시에 모아진 것은 아니다. 한 달에 한번씩도 냈고 1년에 한번씩도 냈었다. 어떤 때는 일주일에 한번씩도 냈었다. 그러기를 36년 동안이나 계속했다. 그렇게 해서 낸 돈 한 푼 두 푼이 모아져 엄청난 돈이 됐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이름으로 그런 돈이 모아졌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던 안정송 할머니의 설명이다.

"우리는 한국에 있었으면 다 죽을 사람이다. 그러니깐 생명 대신에 돈을 바치자. 그런 표어를 내세워 '혈성금'이라는 이름으로 한 달에 얼마씩 바치기로 했어요. 그래서 외국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한국사람들은 독립에 미친 사람들이라고 그랬었지요. 그런데 그나마 현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으니깐 내달 월급에서 내가 낼 터이니 이 달에 얼마를 적습니다 하고 그만큼 열성으로 돈을 보냈었습니다."

요즘말로 바꾸면 독립자금을 내기 위해서 가불을 신청한 것이다. 가불해준 농장 주인들의 눈에 한국인은 정말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녀석들이 뱃심좋게 살아간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곤 아무런 불평 없이 일하는데 놀랐을 것이다.

독립자금은 '혈성금'만으로 다 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인구 세와 같은 방법으로 바친 것도 있었다.

◇혈성금.인두세등 이름 붙여 거둬

하와이에서 살고 있었던 당시 95살 도진호 할아버지의 얘기다.

"미국에서 POLL TAX라고 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인두세라는 것을 냈어요. 식구가 4명이면 4명 5명이면 5명 그리고 7명이면 7명분씩의 세금을 냈습니다. 하와이의 동포들이 모두 다 이 인두세를 내서 임시정부에 바쳤습니다."

퍽 직설적이고 단순한 이름의 세금이다. 그들은 그런 이름으로 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나도 한몫 낀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이름을 내기 위한 한몫은 아니었다. '내 나라를 위하는 일인데 내가 어떻게 빠질 수 있겠는가' 하는 참여의식에서 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독립운동에 쓰여지는가에 대해서는 관계하지 않았다. 필요하다고 하면 어느 때건 바쳤다. 그리고 최소한 필요한 만큼은 바쳤다.

LA에서 살고있었던 이화목씨의 증언이다.

"한가지 놀라운 것은 여기에서 그렇게 돈을 못 버는데도 돈을 바치는 데는 눈물겨울 정도 였다는 점입니다. 해방이됐다고 해서 국민회에서 6명을 대표로 한국에 보내기로 했는데 그 자리에서 2만 달러가 걷혔습니다. 저는 그때 한 30여 명밖에 안 모여서 뭐 돈이 나올 수 있을까하고 걱정스럽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저 먼데 농장에서 일생을 바친 홀아비들이 몇천 달러씩 있는 대로 다 바칩디다. 그래서 2만 달러를 그 자리에서 모았었어요."

정리= 천문권 기자 cmkn@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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