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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美 시장 3위 떠오른 한국자본의 컴퓨터업체 신화

중앙일보

입력

제2의 실리콘 밸리라는 미국 남가주의 어바인. 이곳에 이머신(eMachines Inc.)이라는 컴퓨터 제조업체가 둥지를 틀고 있다.
이 회사에 최근 미국 컴퓨터 업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파격적인 저가 PC로 순식간에 미국 시장을 파고들어 일약 미국시장 점유율 3위로 뛰어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3분기 결산의 성적표다. 한국계 기업으론 입이 딱 벌어지는 놀라운 성적이다.

여세를 몰아 나스닥(NASDAQ) 상장을 선언한 이 회사는 세계 증권가의 중심인 월가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상황이다.

미국에서의 성적을 보자. 시장조사 회사 인포비즈 스토어보드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이머신은 1천 달러 이하 일반 PC시장에서 휴렛팩커드(31%), 컴팩(30%)에 이어 3위(17%)를 차지했다.
IBM(12.5%), 게이트웨이 등을 제치고 메이저 PC 메이커로 부상한 것이다. 가전제품처럼 인식되고 있는 PC시장 전체로 보더라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경이적인 기록이다.

이머신이 미국에 설립된 것은 지난해 7월-. 미국 상륙 1년 만에 PC 판매 1백50만대, 매출액 1백억 달러라는 엄청난 성장세를 보인 비결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일부에서는 연말·크리스마스 특수를 지나면 시장점유율 1위도 넘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을 정도다.
이머신측은 “품질에 아무런 하자 없이 4백 달러선 아래로 PC를 만들 수 있는 회사는 현재 이머신밖에 없다”며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미국과 세계시장 장악은 시간 문제”라고 자신하고 있다.

시장조사 전문가들도 “컴퓨터뿐 아니라 일반 가전기기를 통틀어 단기간에 이런 놀라운 기록을 세운 제조업체는 없다”고 놀라워하는 표정이다.
이머신은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 대목을 노려 매달 40만대의 PC를 생산할 채비로 분주하다. 이머신은 1천 달러 이하의 노트북 PC와 3백 달러대의 5백Mhz급 데스크톱 PC를 주력 상품으로 연말까지 미국 시장을 장악하기 위해서다. 이게 끝나면 아시아와 유럽으로 발길을 돌릴 계획이다.

이머신의 대주주는 한국의 삼보컴퓨터와 코리아데이타시스템스(KDS). 그러나 미국인들은 이머신이 한국계 자본으로 설립된 컴퓨터 회사라는 사실을 거의 모른다. 이머신이 벌인 가격전쟁은 드마라 같다. 6백, 5백, 4백 달러선으로 가격을 낮추어갔다.

그때마다 시장은 벌집을 쑤셔 놓은듯 초긴장했다. 매일 컴퓨터 업계의 톱 뉴스를 이머신이 장악했다. 심지어 ‘공짜’ PC얘기마저 퍼질 정도다.

반면에 전통의 컴퓨터 업체인 팩커드 벨과 게이트웨이는 죽을 맛이다. 실적이 곤두박질치는 탓이다.

가격으로 미 컴퓨터업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이머신사에서는 한국인 직원은 거의 없다. 지난해 7월 회사를 설립할 때만 해도 삼보쪽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으나 현재는 단 1명뿐이다. 수석 마케팅 디렉터 송영길씨(32)가 유일하다. 지난 91년부터 삼보컴퓨터에서 일하다 이쪽으로 건너왔다. 이머신의 성공 요인을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컴퓨터 값이 너무 싸서 의아해 하던 소비자들이 써 보고 HP나 컴팩의 제품에 뒤지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됐죠.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권하면서 가정의 제2의 PC로 이머신을 찾고 있습니다. 미국 소비자들의 품질에 대한 반응은 아주 솔직하고도 뜨거워요.

미국 경제에서도 보기 드문 단기간의 매출액 급신장이 이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머신은 컴퓨터뿐 아니라 TV 등 가전제품 시장에서 마케팅 혁신을 일으켰다고 자부합니다.”

지난해 말 4백Mhz 이상의 고성능 기종 PC가 5백99달러라는 가격표를 붙이고 나타나자 컴퓨터에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고객으로 떠올랐다. 비슷한 기종을 이머신의 3배 수준인 1천8백 달러선에 판매하고 있던 컴팩·게이트웨이 등은 “제살 깎아 먹기”, “출혈 판매”라며 반발했다.

그럴만도 했다. 1천5백 달러 이상의 고급 기종을 주로 생산하는 컴팩사가 최근 크게 고전중이다. IBM은 소매시장을 아예 포기한 상태. 고민하다 대형 시스템에 주력하기로 방향을 틀었다. 팩커드 벨이나 게이트웨이는 PC시장에서 거의 밀려난 상태다.

이머신의 공세를 꺾기 위한 기존 회사들의 방해공작도 심하다. 온갖 꼬투리를 잡아 소송을 걸고 있다.

그래도 시장은 이머신 편이다. 무엇보다 돈이 없어 PC와는 거리가 멀었던 미국 서민·학생들에게 PC를 선물로 안겨 주었기 때문이다. 저가가 새 시장을 만든 셈이다. 이머신은 어떻게 그렇게 파격적으로 가격을 내릴 수 있었을까?

이머신의 성공은 비슷한 시기에 컴퓨터 제조업으로 미국에 진출한 테크미디어(Tech media)·이지컴(EZcom) 등의 실패를 비교해 보면 해답을 얻을 수 있다.

테크미디어 등은 미국 현지에서 부품을 조달해 직접 조립하는 방식으로 PC를 공급했다. 한국 직원이 많았고 한국 또는 대만의 부품을 써 아시아에서 온 컴퓨터라는 인식이 많았다. 반면 이머신은 철저하게 한국의 삼보컴퓨터 제조라인을 이용하면서도 완제품에 완전히 미국적인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

이머신은 저가정책을 조립공장에 일방적으로 통보했고 부품 조달업체들은 이에 협조했다. 대량생산 계획과 초저가의 공격적인 마케팅이 호응을 얻으며 삼보컴퓨터는 물론 메모리와 하드디스크 등에 강한 삼성전자 등 한국기업들이 발벗고 나섰다.

한국 제조업체들이 과거 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 방식에 의존했던 것을 역이용했다고도 할 수 있다. 대만의 대규모 지진으로 세계의 PC 시장은 몸살을 앓았지만 대부분의 부품을 한국에서 조달하는 이머신은 득의양양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인텔도 우군이었다. 컴퓨터 가격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윈도 시스템과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을 ‘파격적으로’ 싼 값에 공급해 주었다. PC를 대량으로 보급하니 얼마나 예뻤겠는가. 이제는 미국 대기업들이 경쟁적으로 가격을 내려 이머신에 부품을 공급하겠다고 나설 정도다.

이머신의 마케팅 성공에는 미국 가전 소비 시장을 꿰뚫고 있는 스티븐 더커 사장의 역할도 컸다. 대형 컴퓨터 용품 소매업체인 컴퓨USA의 수석 부사장을 역임한 그는 이머신으로 옮긴 후 값싼 PC를 서킷시티(Circuit City), 컴퓨USA, 프라이스(Fry’s) 등 대형 가전 소매시장에 출품했다.
저가 PC는 인터넷 판매, 주문 판매보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소매를 해야 된다는 것을 그는 보여 줬다.

이머신의 성공은 삼성물산의 흑인 스포츠웨어 ‘푸부(FUBU)’나 자전거·모터사이클용 헬멧 ‘HJC’(홍진 크라운)와 닮았다. 그것은 굳이 핏줄을 알리지 않고 미국 시장에서 뚜렷한 무기를 앞세워 마냥 뛴 것 아닐까.

채규진 중앙일보 LA지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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