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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쳐 줄 사람 없고, 눈치 주고 … 억지로 오른손 전향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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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호 14면

PGA 최장타자인 버바 왓슨이 지난달 28일(한국시간) PGA 투어 파머스 인슈어런스 오픈 첫날 드라이버샷을 날리고 있다. 왓슨은 같은 왼손잡이인 필 미켈슨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샌디에이고 AP=연합뉴스]

2011년 1월 31일은 전 세계 왼손잡이 골퍼들에게 역사적인 날이다. PGA 투어 사상 처음으로 왼손잡이 골퍼가 한 대회에서 나란히 우승과 준우승을 했기 때문이다.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PGA 투어 파머스 인슈어런스오픈 마지막 날. 왼손잡이 최장타자 버바 왓슨(평균 316.9야드·PGA 1위)과 왼손잡이의 대표주자 필 미켈슨(이상 미국)이 1, 2위를 차지하며 왼손잡이 아마추어 골퍼들에게 희망의 빛을 던졌다. 최고의 왼손잡이 장타자와 최고의 왼손잡이 쇼트게임 명수가 마지막 홀까지 팽팽하게 승부를 겨뤘다.

한국 프로골퍼 6923명 중 왼손잡이 0명

TV로 이 장면을 지켜본 정창희(48)씨는 “두 선수의 명승부를 보면서 뜨거운 가슴을 진정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왼손잡이이면서 오른손 골퍼인 정씨는 순간 머릿속에서 불꽃이 번쩍 튀었다고 한다. ‘내가 왜 오른손으로 골프를 치는가’. 그래서 평소 이용하던 골프연습장에 황급히 전화를 걸었다. “왼손잡이 타석과 왼손잡이를 가르쳐 줄 레슨 프로가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없다”였다.

국내에는 왼손잡이 프로골퍼가 몇 명이나 있을까. 한국프로골프협회(KPGA)에 등록된 정회원과 준회원은 5383명이다.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도 1540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두 협회에 등록된 ‘왼손잡이 프로골퍼’는 단 한 명도 없다.

필 미켈슨

“왼손잡이 때문에 리듬 깨진다” 타박
세계적으로 왼손잡이 위인과 스포츠 스타는 너무나 많다. 과학자이자 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 상대성이론의 아인슈타인, 대문호 괴테, 악성(樂聖) 베토벤, 명배우 찰리 채플린, 만인의 연인 메릴린 먼로가 모두 왼손잡이다. 최연소 남자 테니스 커리어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라파엘 나달(스페인), 2003년 메이저대회 마스터스에서 왼손잡이로는 처음으로 우승한 마이크 위어(캐나다), 메이저리그 강타자 추신수(클리블랜드), 아시아의 홈런왕 이승엽(오릭스) 등도 레프티(lefty)다. 특히 야구와 격투기는 왼손잡이의 천국이다.

전 세계 왼손잡이 비율은 인구의 10% 정도라는 통계가 있다. 어렸을 때부터 왼손 사용을 금기시하는 한국의 경우는 인구의 4~5% 정도로 추정된다. 국내 아마추어 골퍼 중 왼손잡이는 3만~5만 명으로 추산된다.

왼손잡이 골프동호회인 레프티골프(www.leftygolf.co.kr)의 김주헌 회장은 “한국에서 왼손잡이 골퍼로 살아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했다. 그는 “당해 보지 않고서는 ‘차별의 설움’을 모른다”며 “오른손 골퍼들이 왼손잡이와 라운드하는 것을 꺼린다. 함께 라운드하다 볼이 잘 맞지 않으면 ‘너 때문에 스윙 리듬이 깨진다’며 왼손잡이 동반자를 탓한다”고 했다.

이처럼 왼손잡이에 대한 사회적 터부(taboo) 문화는 그 뿌리가 깊다. 건국대 최창모(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문화인류학적으로 왼손은 더럽고 불길하다고 여겼다. 이는 이원론적 사고를 했던 고대부터 뿌리 깊게 자리 잡고 계승됐다”고 말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오른손은 남자이고 강하고 옳고 행운이고 하늘이고 낮인 반면 왼손은 여자이고 약하고 그릇되고 불운이고 땅이고 밤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오른손과 왼손을 항상 이항대립(二項對立)의 관계로 규정했다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왼손잡이 골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왼손에 대한 부정적 인식보다는 수요·공급이 맞지 않는 한국 골프시장의 특수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1983년 수입 자유화 조치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골프채를 갖는 건 대단히 어려웠다. 미8군에서 흘러나오는 클럽이나 밀수품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요가 전무한 왼손잡이 채가 있을 리 만무했다.

84년 골프를 시작한 KPGA의 박희선 프로(세란골프연습장)는 “그때는 왼손잡이 클럽은 생각지도 못했다. 1000세트당 1세트가 있을까 말까 했다. 그것도 선금을 주고 한 달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핑(미국)과 던롭(일본) 등 메이저 골프용품 업체들이 왼손잡이 풀세트를 구비해 놓고 있다. 하지만 일부 업체에서는 수량을 제한하거나 주문 제작을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스윙을 배우거나 연습할 수 있는 환경은 아직도 열악하다. 왼손잡이 타석을 갖춘 골프연습장과 스크린골프방이 있긴 하지만 50타석에 1타석도 안 되는 게 현실이다. 또 왼손잡이는 옆 타석 사람과 마주 보고 스윙하게 돼 서로 껄끄럽다.

김순희 프로 “오른손 배우느라 죽을 고생”
더 큰 문제는 가르쳐 줄 선생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송병주 KPGA 운영국장은 “국내는 왼손잡이 골퍼를 가르치는 전문 교습가가 없다. 이 때문에 왼손잡이 선수가 나올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도 상황은 똑같다. 왼손잡이 7명을 가르쳐 본 박희선 프로는 “모든 스윙 설명을 반대로 해야 하고 타석이 없어 레슨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 이런 이유로 프로들이 왼손잡이 손님에게 ‘골프 스윙은 왼손이 리드하니까 오른손잡이로 배우는 게 유리하다’고 권유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2003년 KLPGA 투어에서 우승한 김순희 프로(왼손잡이)는 “오른손잡이 기준으로 오른손은 거리, 왼손은 방향을 지배한다. 그런데 왼손잡이가 오른손으로 치면 그게 반대로 된다. 나도 오른손으로 골프 배우느라 죽을 고생을 했다. 왼손으로 쳤다면 훨씬 좋은 성적을 올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인·소수자 취급을 받고 있는 왼손잡이 골퍼들이 뭉쳐 ‘권익 찾기’에 나서고 있다. 레프티골프 김주헌 회장은 “골프연습장에 연습할 타석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전체 타석의 10%는 왼손잡이용이 되도록 목소리를 높여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골프클럽 공동 구매, 왼손잡이 전용 레슨 서적 제작, 국제 아마추어 왼손잡이 골프대회 개최 등을 계획하고 있다. 또 스크린골프 업체와 손잡고 전국 골프방에 왼손잡이 전용방을 만드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10년 후에는 한국의 왼손잡이 골퍼가 PGA나 LPGA 대회 마지막 홀에서 왼손으로 우승볼을 던져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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