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빈곤시대에 여전히 재벌을 노래하는〈햇빛 속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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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드라마를 보면서 이게 드라마야, 만화야 하며 혼자 중얼거리는 게 생활이 되었다. 멜로드라마는 한없이 순정만화 같고 시트콤은 한없이 명랑만화 같기 때문이다. 하긴 드라마나 만화나 원래 상상의 세계, 허구의 세계를 그려내라고 있는 것이니 그럴 수밖에...

그러나 만화는 한없이 상상의 나래를 펴도 슬그머니 용서가 되는데 어찌된 일인지 드라마는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현실과 어느 정도 맞닿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래서인가.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MBC 수목드라마 〈햇빛 속으로〉를 보면서도 자꾸 삐딱한 시선을 보내게 되는 것은...

인하(차태현)와 명하(장혁)는 친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왔다. 왜냐하면 인하는 재벌 아버지(박근형)와 함께 살고 명하는 밤무대 가수인 엄마(김영란)와 함께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벌 집안끼리의 친목을 위해 집안에서 인하의 결혼을 추진하려는 또다른 재벌집 딸 수빈(김하늘)은 본처의 자식이 아니다. 거기에 가난한 산동네 아래위집에 살면서 어렸을 때부터 명하와 이웃 오빠동생 사이로 지내며, 부모도 형제도 없이 이모집에 얹혀살고 있는 연희(김현주)가 나온다.

일단 여기까지만 얘기해도 눈치빠른 사람들은 이미 〈햇빛 속으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재벌가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지만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라난 명하와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지만 항상 그 부와 가식적인 생활을 부담스러워하는 반항아 인하는 어느 날 자신들에게 이제껏 모르고 살아왔던 부모와 형제가 있음을 알고 괴로워하며 인하와 명하, 연희와 수빈의 사랑은 집안의 계획과는 어긋나, 인하는 집안에서 정해준 신부감 수빈이 아닌 수빈의 친구 연희를 사랑하고 수빈 또한 연희의 이웃사촌 명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한창 얘기가 가속을 붙여 달려나가고 있는 상황이라 앞으로 극중 인물들의 사랑과 갈등, 그리고 운명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는 계속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무슨 드라마의 공식처럼 반항적인 재벌가의 아들이 등장하고 그 재벌 2세에게는 항상 태생의 비밀이 있다.

그가 가난하지만 착하고 똑똑하며 생활력 강한, 그리고 재벌 2세를 사랑하면서도 그가 지니고 있는 부와 명예는 경멸하는 그런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예전에 안재욱과 최진실이 주인공으로 나와 화제가 되었던 〈별은 내 가슴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었던 기억이 있다) 것을 보고 있자면 우리네 드라마는 왜 저렇게 기계에서 붕어빵 구워내듯 똑같은 것 일색인가 싶어 맘 한구석이 착잡해진다.

우리 사회엔 분명 재벌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자식들끼리의 결혼을 통해 끊임없이 그 계급체계를 이어가고 있으며 체면을 세우기 위해 자식들을 유학 보내고 학위를 땄다고 거짓으로 둘러대기도 한다. 또한 조선시대는 아니지만 요즘의 재벌가에도 홍길동처럼 서러움과 구박을 받는 서자가 있고, 재능과 자질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재벌 2세가 낙하산으로 버젓이 재벌기업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것 등등 〈햇빛 속으로〉에서 그려지고 있는 재벌들의 생활은 사실 말로만 듣던 우리네 재벌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강남이나 신촌 주변을 둘러보면 극중의 인하처럼 뚜껑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 외제차를 스스럼없이 몰고 다니는 젊은이들을 종종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햇빛 속으로〉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괜찮은 드라마라는 생각을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는 그런 재벌들의 황홀한 생활이 그저 그림의 떡인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극적인 재미를 주기 위해, 또는 서민들에게 대리만족이라도 주기 위해 재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 것도 이젠 이미 한물간 레퍼토리 아닐까? 누군가가 〈햇빛 속으로〉는 재벌들의 얘기가 중심이 아니라 불행한 한 가족의 가족사와 그들이 갈망하는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아무리 내게 말해준들 쉽게 수긍하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드는 건 아마도 그 드라마 속에서 나와 내 이웃의 삶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IMF의 위기가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다는 소식 뒤편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신빈곤시대'라는 말을 들으며 아직도 재벌가를 헤매고 있는 드라마들이 성큼 서민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는 따뜻한 얘기들을 들려주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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