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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남산에서 국궁을 만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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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 국립극장 옆으로 작은 오솔길이 하나 있다. 그 길을 따라 한참을 오르면 산마루에 다다른다. 이 위에 아는 사람만 아는 공간이 숨어 있다. 국궁장 ‘석호정(石虎亭)’이다.

 사정(射亭·활을 쏘는 정자) 앞 돌 바닥에 숫자가 새겨져 있다. 궁사가 활을 쏠 때 자리하는 ‘사대’다. 사대에 바투 다가서자, 발치 아래로 큰 골짜기가 눈에 들어온다. 20m 아래 골짜기는 소나무·참나무 울창한 숲이다. 그 숲 건너편, 그러니까 사대 반대편 산비탈에 과녁이 있다. 사대에서 145m 거리다. 마침 활이 시위를 떠났다. 활이 큰 아치를 그리며 숲 위를 날아갔다. 장관이었다.

 국궁은 전통의 활쏘기다. 활쏘기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양궁과 구분하기 위해 국궁이 됐다. 우리나라 음악을 국악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그래서인지 국궁이란 낱말에선 낡은 냄새가 풍긴다. 지금도 활 쏘는 사람이 있을까 싶고, 어쩐지 양궁에 비해 궁력도 떨어질 것 같다.

 

눈 내리는 날 활 쏘는 것을 ‘설사(雪射)’라고 한다. 한 여궁사는 눈 내리는 소리 들으며 말 없이 활쏘기를 익히는 ‘습사무언(習射無言)’이 좋아 눈만 내리면 활터를 찾는다고 했다. 눈 내린 서울 남산 석호정에서.


하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우리나라에는 모두 350여 개 사정이 있다. 옛날에 그랬다는 게 아니다. 현재 대한궁도협회에 소속된 국궁장 숫자다. 나영일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의 자료에 따르면 2009년 현재 대한체육회에 등록된 양궁 선수는 1559명이고, 국궁 선수는 1만 1560명이다. 선수 숫자만 놓고 보면 국궁은 축구 다음으로 인기가 높은 스포츠다. 일제가 민족문화 말살정책만 펼치지 않았어도, 요즘에도 온 국민이 활을 쏘며 놀고 있을지 모른다. 괜히 동이(東夷)민족이 아닌 것이다.

 전 세계를 제패한 한국 양궁도 사실은 국궁에서 비롯했다. 활 잘 쏘는 동쪽 민족의 거룩한 DNA를 운운하는 게 아니다. 1959년 당시 고교 체육교사였던 고(故) 석봉근(1923∼99) 선생이 남산 석호정에서 젊은이들에게 양궁을 전수한 게 한국 양궁의 시초였다. 그러니까 석호정은 한국 양궁의 태자리인 셈이다.

 이 석호정이 남산에서 사라진다는 소식이다. 서울시는 ‘남산 르네상스’ 계획에 따라 석호정을 은평구로 이전한다고 발표했다. 석호정 역사가 300년이 넘는다지만, 사정 자체는 1970년 지어져 문화재적 가치가 작다는 게 서울시 판단이란다. 르네상스의 정신은 전통의 복원에 있는데, 서울시의 르네상스는 의미가 다른가 보다.

 국궁을 소개한다. 서울시는 모르겠지만, 국궁은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다. 굳이 민족유산 떠들지 않아도, 국궁은 중독성 강한 레저다. 남산 기운 받으며 시위 한번 당겨보시라 권한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글=서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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