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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자 DN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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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

1994년 10월이었다. 소설 ‘토지’ 완간 잔치가 강원도 원주 박경리 선생 자택에서 열렸다. 취재차 간 그곳에서 뜻밖에 정주영(당시 79세)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만났다. 햅쌀 수십 가마를 선물 삼아 싣고 온 참이었다. 그가 바다를 메워 일군 서산간척지에서 난 쌀이었다. ‘인(人)의 장막’을 헤집고 곁으로 파고들었다. 불문곡직 소매를 부여잡곤 “인터뷰하고 싶습니다. 꼭 해주십시오”하고 매달렸다. 표정이 너무 절박했던 걸까, 그가 답했다. “처자가 배짱이 좋구먼. 내일 회사로 오라고.” 군소잡지 초짜 기자로선 믿기지 않는 행운이었다. 그는 애초 내 소속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다음날 새벽 5시 서울 안국동 현대 사옥으로 갔다. 함께 여의도로 가 헬기를 타고 서산으로 향했다. 이후 1박2일은 가위 자갈길과 ‘갤로퍼’, 뭣보다 정주영이란 ‘괴물’과의 사투였다. 하루종일 4700만 평의 간척지를 돌고 돌았다. 그는 땅 한 평, 샛길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매섭게 살피고 즉석에서 해결책을 냈다. 동승한 임원들마저 지쳐 조는데 그만 홀로 반듯했다. 이튿날 헤어질 무렵 그가 말했다. “본 대로 쓰라고. 근데, (질문이) 약해.” 굴욕감으로 얼굴이 벌게졌다. 앞으론 어떤 대단한 인물을 만나도 대화의 축을 틀어쥐는 기자가 되리라 이를 물었다.

 2002년 2월, 당시 시사월간지 기자이던 나는 벌써 5시간째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상대는 박현주(53) 미래에셋 회장, 그가 있는 곳은 미국 뉴욕의 호텔방이었다. 극구 인터뷰를 피하던 그는 막상 판이 벌어지자 집요한 승부사로 돌변했다. 현지시간 새벽 5시, 그러나 전화 끊을 뜻은 없어보였다. 그에겐 세상을 보는 나름의 ‘관(觀)’이 있었다. 26세 때 국내 최초 투자자문사를 세운 이야기든, 증권사 입사 45일 만에 대리가 된 사연이든 그에게 중한 건 과거 영광이 아니라 거기서 뭘 깨쳤는가였다. “돈을 벌려면 소수의 편에 서라” “바람 잘 때 팔랑개비를 돌리는 법은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란 말을 그에게 처음 들었다.

 며칠 전 벤처투자사 ‘본엔젤스’의 장병규(38) 대표를 만났다. 스물셋에 인터넷 기업 ‘네오위즈’, 서른둘에 검색업체 ‘첫눈’을 창업한 1000억원대 자산가다. 첫눈 매각으로 번 350억원 중 30%는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그와 직원들은 서로를 ‘님’이라 칭하며 무람없이 어울렸다. 거듭 창업에 나서는 이유를 물었다. “평범치 않은 삶이다. 그게 좋다. 동료들과 뭔가 이뤘을 때 희열은 돈 주고는 못 산다.”

 세대가 다른 세 기업인에겐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열정, 통념 대신 직관을 따르는 용기, 배경 아닌 사람을 볼 줄 아는 혜안. ‘창업가 DNA’란 게 있다면 이런 것들일 게다. 청년들에게 “취업이 어려우면 창업하면 될 것 아니냐”고 은근히 다그치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른바 ‘스펙’으로 사람 가치를 매기는 데 익숙한 젊은이들에겐 이 또한 과한 요구일 터. 열정이 영어 실력보다 더 큰 재능임을 믿어주고 밀어주는 사회가 먼저 돼야 하지 않겠는가.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