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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74)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19

눈은 이미 꽤 쌓여 있었다.
오가는 차들도 거의 없었다. 비닐하우스 사이를 지나고 산협 사이로 들어서자 철골조로 지은 단층 건물의 입구가 나타났다. 입구의 철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제석궁’이라는 현판이 보였다. 노인과 지적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이라 했다. 쇠울타리로 둘러싸인 건물이었다. 처음엔 공장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고 했다. 붉은 벽돌로 축조한 굴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건물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M자머리와 다른 중년남자가 우리들을 맞이했다. M자머리가 손을 들어 보였다. 바로 ‘제석궁’의 원장이었다.

제천댁을 꽁지머리가, 노파를 중년남자가 업었다.
원생들이 기거하는 곳으로 보이는 복도 입구엔 잠금쇠가 설치된 문이 따로 더 달려 있었다. 복도를 중심으로 양쪽에 배치된 방문들이 보였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사람이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적막하고 황량했다. 어디선가 잡음이 낀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으나 어느 방향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내가 본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꽁지머리에게 업힌 제천댁을 따라가려는 나를 M자머리가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M자머리는 나를 곧 식당 같은 데로 안내했다.

“여러분이 있을 텐데, 되게 조용하네요.”
“노인들이야 밥숟가락 놓으면 잠들지. 장애인들도 뭐 그렇고.”
내 말에, M자머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촐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앞치마를 두른 한 사람이 등을 돌린 채 삶은 돼지고기를 썰고 있었다. M자머리도 아직 저녁식사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돼지고기를 통과해 도마에 닿는 칼날 소리가 리드미컬하게 들렸다. 워낙 키가 작고 어깨 폭이 좁아 칼질하는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뒷모습만으로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꽁지머리와 중년남자가 곧 돌아왔다. M자머리가 꽁지머리에게 물었다.

“손가락 잘린 데 살펴봤는가?”
“김실장이 워낙 처치를 잘했더라고요. 그대로 아물면 되겠어요. 항생제 주사했고 소독도 새로 했어요.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의무실에 그대로 두었어요. 저녁 먹고 함께 가보시지요.”
“같이 온 노인은?” “역시 애기같이, 자고 있어요.”
“미음이라도 쑤어 먹여야 할 텐데.”
내가 혼잣말하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차피 죽으러 온 사람, 아저씨는 신경 꺼요. 자식들까지 버린 사람들인데요 뭐. 이제 패밀리가 됐으니 아저씨도 알 건 아셔야지. 제석궁이 어딥니까. 죽어서 가는 데죠. 안 그래요?”
“쓸데없는 소리…….”

M자머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돼지고기를 담은 접시가 식탁 위로 날라져 왔다. 돼지고기를 썰어온 사람은 남자였다. 접시를 내려놓고 돌아서는데 얼핏,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잔주름이 많은 거무튀튀한 얼굴이었고, 초점이 흐릿한 눈빛이었다. 꽁지머리가 소주병의 마개를 따며, “소주잔 좀 가져와!”라고 일렀다. 남자의 나이가 훨씬 많아 보였는데 꽁지머리는 무조건 반말이었다. 남자가 까치발을 하고 찬장 높은 곳에서 소주잔을 꺼냈다.옷이 흘러내려 팔뚝까지 맨살이 잠깐 드러났다. 피멍자국 같은 것이 보였다.

손끝도 파르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숟가락을 든 채 소주잔을 가져다 놓는 남자의 시선을 붙잡으려고 애썼다. 남자의 시선이 내 눈 속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엉성하게 못질해 만든 피켓이 확연히 떠올랐다. ‘제 딸을 돌려주세요, 제발요!’ 피켓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이사장을 만나게 해달라면서, 피켓을 들고 샹그리라 앞에 와 서 있다가 김실장 노과장에 의해 억지로 차에 태워져 떠난 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바로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왜요, 본 적 있는 얼굴이에요?”
“아, 아닙니다. 그냥…….”
꽁지머리가 묻고,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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