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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영미, 유럽축구 현장을 가다 ② 볼턴, 그리고 이청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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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청용이 14일(한국시간) 영국 볼턴의 리복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0~2011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에버턴과의 홈경기에서 1-0으로 앞서던 후반 22분 대니얼 스터리지(왼쪽)의 쐐기골을 어시스트했다. 시즌 7호 도움. 이청용이 2-0 승리를 확정 지은 후 홈팬들을 향해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고 있다. [볼턴 로이터=연합뉴스]

저녁 8시 경기 전 선수들이 등장했다. 돌아온 이청용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혹시 싶어 치아 교정할 거냐 물었다.“생각 있는데 … 나중에 시간 되면요.”코일 감독은 훈련복 입고 지휘한다. 선수임을 느끼려고 그런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택시를 부르려니 청용은 직접 시내까지 바래다줬다.

최영미 작가(오른쪽)가 지난 3일 이청용과 볼턴 훈련장에서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볼턴 원더러스는 1874년 볼턴의 크라이스트 처치를 연고로 세워진 축구클럽이다. 초창기에 운동장을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아 4년간 세 번이나 홈구장이 바뀌어 방랑자(Wanderers)라는 낭만적인 이름이 붙여졌다. 이름만 놓고 볼 때 프리미어리그에서 시인인 내가 좋아할 팀은 ‘원더러스’밖에 없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주말마다 ‘방랑자’를 기다리며, 혹 맨체스터연합에 밀려 볼턴의 경기가 녹화방송으로 편성되면 새벽까지 자지 않는다. ‘맨체스터연합’은 늘 이기니까 긴장감이 적어 재미가 없다. 이청용 선수가 오고 코일 감독이 부임한 뒤부터 볼턴은 세밀하고 매력적인 축구를 보여주며 성적도 상승해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이 주어지는 4위권으로의 도약이 멀지 않다.

 울버햄프턴과 볼턴 원더러스의 경기를 앞둔 2월 2일.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궂은 날씨에 관중이 얼마나 올지. 하긴 우중충한 겨울 저녁에 하루 일과를 마친 노동계급에 축구만큼 흥미진진한 소일거리가 또 있을까. 맨체스터에서 볼턴은 기차로 삼십 분 거리. 볼턴의 홈구장이 위치한 호르위치 파크웨이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며 신문을 샀다. 카이로에 모인 백만의 인파. 이집트 박물관, 그리고 나일강이 표시된 시내 지도는 나를 역사의 한복판으로 내던진다. 오바마가 집권할 때부터 아랍 세계의 변화를 예상했지만, 이집트에서 시작될 줄은 몰랐다. 그렇게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아랍이 변하고 있다. 유럽에 머무르는 동안 현재와 과거가, 축구와 혁명이 내 속에서 끊임없이 교차하리라.

 리복 스타디움에 도착해 축구에 몰린 인파에 휩싸이며 다시 시간은 현재진행형이 된다. 말을 탄 경찰들에 놀라 이유를 물었더니, 훌리건들을 감시하려면 높은 곳이 편해서라나. 저녁 8시. 선수들을 소개하는데 이청용의 귀환을 환영하는 박수 소리가 높았다. 아시안컵이 끝나고 첫 경기인데, 선발로 나와 후반에 교체되기까지 에너지 넘치는 플레이는 여전했다. 예측불허의 창의적인 패스는 성공하지 않더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관중석에서 그를 지켜보며 나는 확신했다. 그에게는 사람의 눈을 끄는 무언가가 있다. 그는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선수다.

 2월 3일 낮 12시. 볼턴의 훈련장 옆의 구단 건물 로비에서 이청용 선수를 만났다. 인터뷰에 앞서, 서울의 조카에게 선물할 사인을 받으려고 나는 종이를 내밀었다. 그냥 사인만 휙 긋지 않고 그는 정중하게 내 ‘조카분’의 이름을 물었다. ‘H에게’라고 쓰고, 알아보기 쉽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사인 밑에 또박또박 정자로 덧붙이는 세심함이라니.

오언 코일(Owen Columba Coyle)

-웃을 때 [엉망인] 잇속이 드러나 더 매력적인데, 혹시 치아교정 계획 없나?

 “생각은 늘 있는데, 여기서 축구하면서 교정한다는 게 좀 힘들어서, 나중에 시간 나면….”

-볼턴에 온 뒤 자신이 골을 넣은 모든 경기에서 팀이 승리했다. 4득점·6도움을 기록하며 2010년 볼턴 구단 선정 올해의 선수에 지명되었다. 사실 더 득점을 올릴 수도 있는데 동료에게 양보하는 장면을 종종 본다. 왜 골 욕심을 내지 않는지?

 “내 욕심이 앞서서 팀 플레이를 망치는 걸 원하지 않는다.”

-프리미어리그에서 상대하기 가장 껄끄러운 팀은?

 “맨유나 첼시 같은 팀과 경기하면 우리가 공을 가지고 있는 시간이 적고, 힘쓸 틈도 없이 당한다.”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나?

 “8시, 7시반.”

 자명종 없으면 못 일어난다고 수줍게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잠꾸러기 소년. 그는 여리고 순수한 스물두 살의 청년이었다. 잠이 부족한 얼굴을 더 붙잡고 있기가 미안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택시를 부르려는데, 그가 나의 목적지를 묻더니 볼턴 시내까지 태워주었다. 그의 차에서 인터뷰가 계속되었다.

-한국과 영국 프로축구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인가?

 “여기서는 지든 이기든 지나간 경기는 빨리 잊는다.”

 조용한 볼턴에서 점심을 먹고 미술관을 돌아본 뒤에 맨체스터행 기차에 올라탔다. 볼턴 미술관의 이집트실에서 본 ‘고양이 미라’의 두 눈이 자꾸 생각났다. 2000년 전에 반짝이다 사라진 생명의 무상함에 비추면 축구와 혁명은 무엇인지.

 2월 11일. 볼턴 원더러스의 훈련장. 코일 감독의 방에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겨울인데도 외투를 걸치지 않고 선수처럼 짧은 운동복 바지만 입고 경기장에 서있는 감독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춥지 않은가?

 “나는 선수 출신이다. 축구선수를 그만두고 코치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선수임을 느끼고 싶어서 훈련복을 입는다. (그는 인터뷰 끝에도 ‘선수와 코치 중에 선택하라면 나는 선수이고 싶다’며 아직도 뛰고 싶은 열망을 강력히 드러냈다.) 정장보다 셔츠가 더 편안해서. 내가 편안해야 경기에 집중할 수 있으니까 선수들과 같은 옷을 입는다. 추우냐고? 물론 때로 매우 춥다(웃음). 그러나 경기에 집중하면 추위를 모른다. 경기가 끝나서야 추위를 느낀다.”

-볼턴 원더러스의 감독으로서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어려서부터 축구를 사랑했는데 선수를 거쳐 지금 감독이 되었으니 나는 선택된 사람. 행운에 감사하며 내 직업의 모든 것을 즐긴다.”

-프리미어리그에는 알렉스 퍼거슨이나 당신처럼 스코틀랜드 출신의 감독이 많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강한 이유는?

 “현재 6명의 스코틀랜드 출신 감독이 세계 최고의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활동 중이다. 그들은 열정적이며 힘든 일을 두려워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든 최대치를 끌어낸다.”

오언 코일(Owen Columba Coyle)

1966년 스코틀랜드 출생. 93년부터 95년까지 볼턴 원더러스 선수였고, 2010년 1월부터 볼턴의 감독직을 맡았다. 코일 감독을 비롯해 알렉스 퍼거슨(맨유), 케니 달글리시(리버풀), 데이비드 모예스(에버턴), 알렉스 맥리시(버밍엄시티), 스티브 킨(블랙번) 등 모두 6명의 프리미어리그 감독이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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