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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7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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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17

평생 무엇인가를 붙잡기 위해 헤매던 손이었다.
누군가가 붙잡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던 손이기도 했으며, 누군가에게 먹이려고 생선을 토막 내고 푸성귀를 다듬고 뼈로부터 고기를 분리해냈던 험한 손, 손가락이었다. 그러나 이제 곧 그 손가락들은 아무것도 토막 내거나 다듬거나 분리해낼 수 없는 무용지물이 될 터였다. 그런데도 손가락들은 여전히 그녀를 강력히 붙잡고 있었다. 그것은 그러므로 비열하고 비천했다. 아니 자신이 그나마 가진 것은 이제 겨우 그것들뿐이라고, 그녀는 그 순간 생각했을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단호하고 격렬하게, 그러면서도 존엄하게, 집게손가락의 둘째마디 위에 칼날을 수직으로 대고, 상반신의 힘을 보태서 꾹 눌러, 썰었다. 칼을 다루는 데 있어 남다른 경험을 갖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병이 깊었기 때문에 단 한 번의 칼질로 깨끗한 마무리를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뼈는 생각보다 훨씬 더 완강히 그녀에게 저항했다. 악착같이 그녀를 붙들고 있는 손가락뼈를 자신으로부터 분리해 내기 위해, 그녀는 그래서 두 번, 혹은 세 번, 생선을 토막 낼 때보다 훨씬 더 격정적인 손길로 잇달아 마무리 칼질을 해야 했다. ]

법회에서 나는 맨 후미에 앉아 있었다.
주지스님이 막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있을 때였다.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이라, 보이는 사물의 참된 모습은 있는 듯하지만 없는 것이고, 실체가 없다 하지만 그 모습은 눈에 보이나니, 알고 보면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법도 따로 고정됨이 없으며, 보이는 세계와 의식세계까지 따로 고정됨이 없다, 라고 주지스님은 말하고 있었다. 문소리가 왈칵 났다. 명안진각 문을 활짝 열고 들어서는 그녀를 제일 먼저 명확히 본 것은 문 바로 앞에 앉아 있던 나였다.

사람들은 놀랐으나 그녀가 너무도 당당히 들어왔으므로 처음엔 모두 가만히 있었다. 그녀가 걷는 대로 쫙 갈라졌을 뿐이었다. 발목까지 내려온 잠옷은 성스런 예배를 위한 성의(聖衣)인 듯 나부꼈고 산발한 머리는 검은 바다처럼 출렁거렸다. 흰 행주로 싼 것이 그녀의 피 흐르는 손에 들린 채 앞으로 뻗어 나와 있었다. 피가 뚜둑, 뚜두둑, 명안진각 잘 닦인 마루 위로 떨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피를 밟고 곧게 걸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활보였지만 얼굴은 깊은 슬픔에 가득 차서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스님…….”

그녀는 간신히 스님을 불렀다.
제단 앞에 와서 비틀, 하고 쓰러진 건 한 순간이었다. 손에 들고 있던 행주가 바닥으로 떨어질 때, 피 묻은 손가락이 행주의 요람을 쑥 벗어났다. 사람들이 제단에 나동그라진 그것을 그녀의 손가락이라고 판단하기까진 죽음의 찰나보다 더 깊고 짧은 적멸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것은 분명히 그녀에게서 완전히 분리된 집게손가락이었다. 피칠갑이 된 구부러진 손가락은 죽은 닭발의 일부 같았다. 끊어진 손가락이 펴졌다 오므라들었다 하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났고, 미소보살과 백주사가 앞으로 쫓아 나왔다. 제천댁은 이미 혼절해 있었다. 반야심경을 독송하던 주지스님의 두 손이 재빨리 하나로 합쳐졌다.

소란은 오래 가지 않았다.
김실장의 손짓에 내가 달려 나가 제천댁을 업었다. 손가락이 절단된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내 앞섶을 적셨다. 나는 뛰듯이 걸었다. 퉁퉁 부어오른 그녀는 이외로 새처럼 가벼웠다. 김실장이 지혈을 위해 거즈를 겹쳐대고 손을 묶을 때 나는 창 너머로 새떼들이 우르르르, 헐벗은 숲을 향해 들까불며 날아가는 것을 망연히 보고 있었다. 아무도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미소보살만 따라 나왔을 뿐, 이모와 삼촌들은 미소보살의 명을 받고 모두 명안진각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초하루 법회는 마음으로, 입으로, 몸으로, 계율을 지키지 못한 허물을 밝히고 스스로 허물을 더 이상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서원(誓願)의 시간이었다. 법회는 계속됐다. 주지스님은 독송하다 중단한 반야심경을 끝까지 암송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坵不淨) 부증불감(不增不減)…… 법의 참 모습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럽혀지는 것도 아니고 깨끗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라고 주지스님이 외칠 때, 방구댁만이 홀로 무릎걸음으로 마루 위의 피를 닦으며 서럽게 흐느꼈다고 했다.
이사장은 때마침 명안진사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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