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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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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변해도 유행을 타지 않는 인간의 '몸'이 있고 세월에 따라 유행을 잘 타는 인간의 '마음'이 있다. 21세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모든 분야에서 좀 '더 좋게' 변했으면 싶다.

음악 세계에도 '마음'과 '몸'이 있다. 마음을 음악심(心), 몸(재료)을 음악물(物)이라고 해보자. 음악의 본질 이해를 추구하는 사람은 '심'이 먼저냐, '물'이 먼저냐 라는 물음을 던진다.

장음계 자체는 음악이 아니다. 음악 '물'이다. '물'(物)의 생리를 모르는 '심'(心)은 없다. '물'과의 지속적 경험 없이는 '심'이 탄생될 수 없다는 말이다. 장조로 된 음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음악심은 장음계라는 음악물에 대한 선이해가 요하다. 경험 이전의 '심'과 경험 이후의 '심'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음악물의 선이해 없이도 음악심이 형성될 수 있다는 말은 옳지 않다.

인간의 삶, 특히 음악적 삶에 '통제'가 필요하다면 '심'(心)보다 '물'(物)의 통제가 중요하다. '물'의 통제가 '심'의 통제 가능성을 높인다는 뜻이다.

악기는 모두 '물'이다. 19세기 한국인에게 피아노라는 '물'은 없었다. 그러니까 서양악기가 한반도에 언제 유입되었는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백 년이라면 긴 세월이다. 하지만 강산이 열 번이 아니라 백 번 변해도 서양음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던 조상들을 가진 한국인이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음악'하면 서양음악이 되어버릴 정도가 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물'(物)의 힘이 그렇게도 강한 것인가.

음악사를 훑어보면, 급격한 문화변동 현상을 목격한다. 음악문화의 변동은 음악인보다 비(非) 음악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질 때가 많다. 음악심에 의해서라기보다 음악심 외적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20세기에 서양음악이 한반도에 유입된 원동력도 음악인(音樂人)이 아니라 정치.경제.종교.군사적 힘이었다. 음악물의 통로가 된 것은 조국 근대화 시도의 일환인 군악대 창설이었다.

1910년부터 일본이 우리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해방전까지 조선총독부가 제도권 음악을 관장한다. 일본식 창가가 보급되면서 장음계와 단음계라는 음악물이 음악의 유일한 재료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말 대신 일본어 사용을 강요당했듯이 전통음악의 '물', 즉 전통음악의 어법 대신 18, 19세기의 양악(洋樂)을 낳게 하는 재료, 즉 '조성 어법'에 대한 감각 개발을 강요당한 꼴이다.

총독부라는 제도권이 마련한 음악교육을 받은 한국인은 순식간에 양악을 수용할 수 있는 '음악 감각'을 개발한다. 한복을 버리고 양복을 '자기 옷'으로 입기 시작한 것처럼 전통음악의 감각 대신 양악의 감각을 '자기의 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자기의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원래의', '자기의' 것이란 없다, 자기의 현재적 삶에 유익한 것이라면 그 원류가 자기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상관 없다는 식의 사고가 팽배했다.

'물'(物) 에 의해 탄생된 '심'(心) 은 처음부터 성숙한 '심'은 될 수 없다. 장음계와 단음계라는 단순한 물적 속성을 다스릴 수 있는 '심'의 작동만이 가능하다. 그래서 양악이 유입되던 초기에는 주로 간단한 '노래'의 만듦이 음악의 만듦이었다. 30년대에 이르면 찬송가.창가.동요.대중가요 등이 음악의 주류로 등장한다. 평조.계면조.우조라는 말보다 장음계.단음계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게 들리기 시작한다.

해방 이후 음악인들은 좌.우익으로 분리된다. 이른바 해방공간이라는 몇 년 되지 않는 짧은 기간의 음악적 양상에 대한 연구는 더 철저히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음악과 정치는 무관하다는 무관론자와, 음악과 정치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유관론자들이 음악의 사회적 기능을 놓고 입장을 달리한다. 그러다가 지금도 우리의 뼈를 아프게 하는 분단이 생기고,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탄생한다.

50년대 중반 한국 악단(樂壇)의 수준은 그야말로 형편 없었다. 대규모 기악곡이나 오페라를 발표한 작곡가는 거의 없었다. 간혹 그러한 작품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이 오늘날 재현되지 않고 있다. 당시 작곡가란 노래를 만드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예술은 '생각'과 '느낌'의 내용을 담는다. 같은 내용을 피아노에 담을 수 있고 바이올린에 담을 수 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음악이 아니다. 음악 이전의 조건인, 음악물이다.

'물'(物) 과 종속적 관계인 음악 '심'(心) 은 전통을 낳는다. 전통은 우리의 일상적 삶을 통제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일상적 삶을 좋게 통제하는 전통을 낳길 원한다. 나는 좋은 전통의 탄생이란 '물'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달렸다고 본다.

60년대부터 음악 분야는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왔다. 관습에 순응하면서도 나쁜 관습이면 끝까지 거부반응을 느끼면서 일생을 산 비평정신의 수호자 박용구,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베를린이 자랑하는 작곡가 윤이상, 세계를 자기 무대로 삼는 지휘자 정명훈까지 탄생했다. 그러나 21세기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물'(物)과 '심'(心)의 주인이 누구냐라는 질문을 다시 한번 던져야 할 것 같다. 문화적 속국에서 탈피하고 우리가 세계의 문화적 중심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물'(物)과 '심'(心)의 주인을 옳게 찾으려면, 음악적 모국어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자기의 '심'을 담을 수 있는 자기의 '물'이 음악적 모국어다. 한복을 버리고 양복을 입은 우리가 다시 양복을 벗고 온통 한복으로 갈아입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통음악을 국악이라고 일컫고, 음악 하면 양악을 지칭하는 지금의 풍토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자는 말도 아니다.

같은 말이라도 한 차원 높게 할 수 있다. '자기를 찾아라. 그리고 자기가 주인이 되라'는 평범한 말도 범인(凡人) 이 하는 것과 성현이 하는 차원이 다르다. 이 나라에 21세기를 옳게 대비할 수 있는 성현이 있다면, 나는 그 성현이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길 원한다.

"그동안 우리는 문화적으로 자기의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일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젠 자기화된 남의 것과 더불어 참 자기를 다시 되찾아라. 그리고 우리가 찾은 것을 남들, 즉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라." 서양음악에 대한 80년대의 비판적 담론이었던 한국음악론.민족음악론, 나아가서 통일음악론의 본격화가 우리에게 갈 길을 제시할 것으로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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