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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71)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16

제천댁이 부엌에서 쓰러진 건 저물녘이었다. 도마질을 하다가 쓰러진 제천댁은 매우 위태로운 상태로 보였다. 물에 불은 무기물처럼 온몸이 퉁퉁 부어 있었고, 얼굴은 새카맸다. 가쁜 숨을 토해내는 것이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모들이 쓰고 있는 방으로 제천댁을 업어 옮겼다.
“문지기 삼촌, 여기 있지 마…….”
내가 방에 눕히고 났을 때 그녀가 낮게 속삭였다.

나는 그녀를 돌아다보았다. 공포감으로 질린 눈빛이었다. 미소보살과 백주사가 들어왔다. 제천댁이 미소보살의 손길을 뿌리치고 간신히 일어나 앉았다. 내게 속삭일 때와 달리, 그녀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모진 눈빛으로 백주사를 노려보았다. 마음속의 공포감을 이기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내 알아차렸다.
“다른 건 바, 바라지도 않아.”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병원에…… 보내달라는 말은 더 이상…… 안 할게. 제발 고, 고향에 데려다줘. 반지하라도 상관없어. 하다못해 사글세방이라도…… 얻어줘요. 고향에서 혼자 살다 죽고 싶어. 전셋집까지 다 바쳤는데, 사글세방 하나도…… 못 얻어줘?”
“제석궁으로 가요. 거기 가면…….”
“거기 못 가. 누가 모를 줄 알아? 거기는…… 묘지야. 이사장님, 만나게 해줘. 이사장님은 내 소원…… 들어…… 줄 거야. 제발…….”
그녀가 일어서려고 몸부림을 치다 기진해 엎어졌다.

김실장이 들어와 그녀에게 주사를 놓았다. 진정제라고 했다. 백주사가 눈짓을 해서 나를 밖으로 쫓았다. 추운 날씨였다. 연못은 꽁꽁 얼어 있었다. 차 한 대가 들어와 주차장에 닿고 있었다. 나를 뒤쫓아 나온 백주사가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밍크코트를 입은 귀부인이 남자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몸집이 큰 여자였다.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처음 명안진사를 발견하고 암벽을 타고 내려와 숨어서 살펴보던 날, 뼈만 남은 노파를 싣고 왔던 여자가 비로소 떠올랐다. 짐작대로라면 여자는 그 노파의 며느리일 것이었다. 노파 역시 최근엔 상태가 아주 나빠져 있었다. 얼마 전 여린의 안마로 ‘은혜’를 받아 일어설 수 있게 됐다고 알려진 노파였다. 노파가 일어나 앉은 것은 며칠뿐이었다.
여자가 백주사의 안내를 받으며 명안진으로 올라갔다.

노파의 아들은 정부에서 고위직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노파는 치매가 깊었지만 얌전한 편이었다. 간혹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뿐 하루 종일 말이 없었다. 최근에 건강상태가 많이 나빠져서 백주사가 며느리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거만한 걸음걸이로 걷고 있는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여기 있지 마.”라고 말하던 제천댁의 공포에 질린 눈빛이 여자의 뒷모습에 오버랩되어 울렸다.

제천댁이 발작한 것은 다음 날이었다.
그날은 주지스님이 주재하는 법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밤새 기진해 누워 있던 그녀가 부엌으로 나왔을 때 이모들은 모두 명안진각에 들어가 법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신중(神衆)에게 재앙이 없기를 기도하는 초하루 법회였다. 명안진사는 그 어느 때보다 고요했다. 반야심경을 독송하는 주지스님의 목소리만이 은은히 들려오고 있었다.

잠자리에 누워 있던 옷차림 그대로인 걸로 볼 때 그녀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부엌에 나왔던 것 같았다. 은은한 주지스님의 독경소리를 들었을 법했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칼은 마침 도마 위에 뉘어 있었다. 생선을 다듬을 때 쓰는 잘 갈린 칼이었다. 결단은 재빠르고 포악하게 내려졌다. 그녀는 칼을 들었고 왼손 집게손가락을 도마 위에 걸쳐 놓았다. 창으로 흘러든 햇빛이 평생 칼을 잡고 살았던 그녀의 검은, 고사목 가지 같은 손가락을 낱낱이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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