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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바라크 퇴진에 “마살라마, 마살라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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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호 01면

해방(타흐리르) 광장에 여명이 비친다. 이집트를 30년간 철권 통치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물러났다. 18일간의 싸움 끝에 승리를 쟁취한 이집트 국민들은 “마살라마, 마살라마(잘 가세요, 잘 가세요)”라며 조용히 독재자를 보내줬다. 이집트 민주화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광장의 햇살은 새 역사를 향한 희망이다.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이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임을 발표한 다음 날인 12일 아침(현지시간), 타흐리르 광장에서 어린아이를 안은 가족이 걸어나오고 있다. [카이로 로이터=연합뉴스]

검정 니카브에 온몸을 꼭꼭 감추고 두 눈만 세상에 내놓은 여인은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어린아이를 어깨에 무등 태운 아빠는 아이의 팔을 붙들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청년들은 국기를 휘두르며 줄지어 뛰어다녔다. 울고, 웃고, 소리치고, 춤추고, 노래하고…. 그들은 벅찬 감격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라했다.

‘키파야 혁명’에 무너진 30년 이집트 독재

11일 오후 6시(현지시간) 보름 전 임명된 새 부통령 오마르 술레이만이 TV에 나와 침통한 표정으로 “대통령이 물러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집트 시민의 승리가 선언되는 순간이었다. 호스니 무바라크의 30년 철권통치는 그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노욕(老慾)의 상징이 된 83세의 대통령은 민중 봉기 18일 만에 백기 투항했다.

카이로 거리에 있던 수십만 시민들은 옆 사람을 끌어안고 껑충껑충 뛰었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상관없었다. “빵빵, 빵빵빵….” 택시·버스·승용차 가릴 것 없이 운전사들은 경적을 울려댔다. 적·백·흑 3색의 이집트 국기가 물결을 이뤘다. 2002년 월드컵 4강 진출 순간의 한국 도시와 비슷했다. 사람들은 점점 불어났다. 집·식당·사원에서 사람들은 나오고 또 나왔다. 삽시간에 거리가 가득 찼다. 인구 1800만이라는 도시의 규모가 실감났다.

시민혁명의 성지가 된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새벽까지 환희의 축제가 벌어졌다. 불꽃이 밤하늘에 드리워지기도 했다. 누군가 이날을 예견했던 것인가. 광장의 이름은 ‘해방’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팽배했던 긴장감과 적대감은 흔적조차 사라졌다. “마살라마, 마살라마.(잘 가세요, 잘 가세요)” 시민들은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며 30년간 집권했던 대통령에게 웃으며 이별을 고했다. 더 이상 그를 욕하지도 않았다. 이들 중 대부분은 다른 대통령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대통령은 서거 때까지 계속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튀니지가 27일 만에 이룬 것을 우리는 18일 만에 해냈다.” 광장에서 한 청년이 다가와 외쳤다. 반정부 시위 27일 만에 대통령을 쫓아낸 튀니지 시민들보다 자신들이 훌륭하다는 얘기였다. 다른 청년은 “누가 이집트에서는 시민혁명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나. 봐라, 우리는 해냈다”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이집트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승리를 의심한 것은 사실이었다. “공권력이 강해서” “반정부 시위에 반대하는 국민이 많아서” 등 이유는 다양했다.

전문가들의 예측처럼 시위는 성공을 거두지 못할 수도 있었다. 제 풀에 꺾여 사그라들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런 때마다 무바라크는 시위대에 새 동력을 제공했다.

무바라크는 지난달 28일 시위가 본격화하자 인터넷과 휴대전화 망을 끊었다. 페이스북·트위터 등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세를 규합하는 청년들의 눈과 귀를 막겠다는 의도였다. 청년들은 유선전화로 서로 광장에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시위대와 공권력의 최대 격전이 벌어진 것은 이 날이었다.

시위대의 규모가 점점 불어나자 무바라크는 수습책을 발표했다. 자신의 측근인 정보기관 수장 오마르 술레이만을 부통령이라는 새로 만든 자리에 앉힌 것이었다. 시민들은 대통령이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시민들이 계속 거리로 몰려 나오자 그는 자신은 9월의 다음 대통령 선거 때 출마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TV에 등장한 그는 “나라를 위해 큰 결단을 내렸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떠난 민심을 붙들기는 어려웠다.

무바라크는 악수를 이어갔다. 정치 깡패를 동원해 시위대를 기습하고 시위 주동자를 몰래 잡아다 감금했다. 그럴수록 시위대는 강해졌다.

9일 약 20만 명이 타흐리르 광장으로 집결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한산했던 광장에 다시 시위대가 몰려나온 것이었다. 12일 동안 감금됐다가 풀려난 구글 임원 와엘 고님(30)의 위성TV 인터뷰가 기폭제가 됐다.

무바라크의 결정적인 패착은 10일 밤의 TV 연설이었다. 이날 오후 무함마드 후세인 탄타위 국방장관은 20명의 장성을 모아놓고 대책회의를 열었다. 카이로 방위사령관은 타흐리르 광장에 찾아와 “여러분의 정당한 요구들은 곧 충족될 것”이라고 말했다. 군이 대통령에게 사실상 퇴진 압력을 가한 것이었다. 시민들은 대통령의 사임 연설을 예상하고 광장으로 밀물처럼 몰려왔다. 하지만 무바라크는 “9월까지는 자리를 지키겠다”는 말로 한순간에 시민들의 기대를 격분으로 바꿔버렸다. 다음 날 이집트 도시의 주요 거리는 시민들로 뒤덮였다. 군은 일부 주요 시설만 방어했다. 카이로의 대통령궁에 있던 무바라크는 황급히 헬기를 타고 휴양도시 샤름 엘 셰이크로 떠났다.

12일 이집트에, 그리고 중동·북아프리카의 아랍권에 새 날이 밝았다. 타흐리르 광장의 시민들은 이번 거사에 ‘1·25 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시위가 끝난 날이 아닌 시작한 날에 더욱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혁명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는 의미로도 읽혔다. 시민들은 그들 앞에 험난한 길이 놓여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감을 표출했다. 대학생 아흐마드 엘파르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30년 안에 우리도 한국·일본처럼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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