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구제역 현장에 전문가 모으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문 길 주
KIST 원장

구제역과 관련, 전국 4000여 곳의 살처분 가축 매몰지가 앞으로 심각한 환경오염원으로 작용할 것이란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동안의 구제역 피해가 축산농가를 중심으로 한 특정 분야의 피해였다면, 이제는 우리가 먹는 물과 환경 등을 중심으로 지역사회 전체에 광범위한 피해가 예상된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과 혼란은 더 클 수도 있을 것이다.

 구제역으로 살처분된 가축 매몰지에서 생길 수 있는 피해 중 대표적인 것이 매몰지의 침출수가 지하수나 인근 하천으로 스며들어 수질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매몰 절차에 따라 침출수의 차단이 잘 이뤄진 곳이 대다수겠지만 차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 피해는 심각하다. 또한 비탈진 곳에 조성된 매몰지는 해빙기와 우기를 거치며 붕괴될 가능성이 크다. 만일 이번 겨울 매몰한 가축들이 부패되기 전에 올여름 장마에 매몰지가 무너져 하천이나 강으로 흘러들어 간다면 그 피해는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려면 가축 사체의 부패를 활성화하고 침출수와 악취 가스를 처리하는 매몰지의 조기 안정화 기술과 침출수 처리·제어기술, 매몰지에 대한 지반 보강 기술 등 다양한 처리 기술이 총동원돼야 한다. 무엇보다 관련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 상황에 맞게 피해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모색해야 한다. 한발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정부가 나서 각 분야의 과학자들을 구제역 현장에 모아야 할 때다. 지하수 전문가와 복원기술자, 수질 환경 전문가, 바이러스 전문가 등이 한데 모여 구제역 피해가 가축뿐 아니라 우리 생활과 환경에 미칠 피해를 최소화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당장 침출수가 흘러나오는 곳은 지반 환경 전문가가 나서 차단벽을 치는 일부터 매몰지의 안정성을 평가한 후 보강하고 심각한 붕괴 위험이 있는 곳은 사체를 재수거해 소각하는 등 각각의 상황별로 피해 확산 방지 기술을 모두 동원하고 이 대응법을 전국에 확산시켜야 한다. 지금 상황은 한두 명의 전문가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각 분야 과학자들을 제대로 융합하고 지식을 나누며 활용해야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급하다고 주먹구구식으로 덮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이렇게 피해가 클 때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야만 우리만의 대응 노하우가 생기고, 그 기술로 매번 반복되는 구제역 피해를 막을 수 있다.

 과거 우리 아버지들은 목돈 마련을 위해 식솔 같은 소를 내다 팔고 나면 막걸리 한 사발에 허전함을 담아 홀로 삼키곤 하셨다. 지금 전국에서 가축과 함께 희망을 잃고 힘들어하는 많은 아버지들의 허허로움을 무엇으로도 달래줄 순 없겠지만, 최소한 먹는 물과 공기가 오염되고 또 다른 바이러스 발생과 질병의 위험 앞에 노출되는 일이 일어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려면 각계의 전문가들을 현장으로 불러야 한다. 그것이 제 2, 제 3의 구제역 피해를 막는 길이자, 구제역 예방과 피해 차단을 위한 새로운 연구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길주 KIST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