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맥 같은 남자, 친구의 여자를 사랑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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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99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97년 첫 소설집 『몽유시인을 위한 변명』을 내고는 10년 넘게 활동이 없었던 소설가 강동수(50·사진)씨가 요즘 부쩍 손바람을 내고 있다. 구한말 황제 직속 비밀 정보기관을 다룬 역사소설 『제국익문사』를 지난해 봄 펴낸 데 이어 새 소설집 『금발의 제니』(실천문학사)를 최근 내놓았다.

 소설집은 어딘지 익숙한 듯 하면서도 강렬한 공감을 자아내는 이야기들이 강세다. 특히 흘러간 옛사랑에 대한 비가(悲歌) 같은 작품이 두드러진다. 표제작부터 그렇다. 엄혹한 학생운동, 보일러를 파열시키는 강추위, 영화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처럼 눈싸움을 벌이는 젊은 남녀, 두 사람을 선망하는 숙맥 같은 남학생…. 80년대 시공간을 즉각적으로 호출해내는 소설의 세목(細目)은 지금, 여기 2000년대의 남루함을 한층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극적 장치다.

 당국의 단속을 피해 친구 자취방으로 ‘도바리(1980년대 시국사건 수배자들이 단속을 피해 도망치던 것을 가리키던 은어)를 친’ 운동권 나는 영준과 여자 후배 은영의 장밋빛 사랑에 마음이 흔들린다. 나는 죄책감을 무릅쓰고 구치소로 면회온 은영에게 뜨거운 눈길을 보내기까지 했었다. 20여 년 후 삼류 변호사 사무장으로 전락한 내가 목격한 현실은 미국으로 이민간 두 사람이 진작 이혼한 후 초라한 중년이 됐다는 사실이다.

 한때는 황금의 꽃처럼 견고하고 찬란했으나 이제는 최소한의 윤기마저 상실한 채 신파극 같은 슬픔과 고통을 전달할 뿐인 옛사랑. 그런 사랑의 쇠락을 지켜보며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은 세파, 세월, 삶이라는 무지막지한 괴물의 잔혹함, 그 앞에 선 인간의 허망함 같은 것들이다. ‘호반에서 만나다’의 나는 젊어서 뜨거운 사랑을 나눴던 신문사 후배 여기자의 사망 소식에 극도의 절망감에 빠진다. ‘7번 국도’의 주인공은 아내에게 배신당한 후 오줌발 시원찮은 50대로 늙는 중이다.

 작가 강씨는 현역 언론인이다. 국제신문 논설위원이다. 그래선지 사태를 지극히 냉담하게 묘사할 뿐 사건을 통해 변화하는 개인을 보여주거나 하지 않는다. 강씨는 “인물의 의식이 변화하는 모습을 구태여 보여주는 게 작위적이라고 생각했다. 여운이 느껴지게 소설의 결말을 맺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사랑 이야기가 과육처럼 소설을 둘러싸고 있지만 작품들이 난개발·물신주의 등 사회적 주제의식을 씨앗처럼 품고 있다”고 했다.

글=신준봉, 사진=최승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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