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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의 시시각각

선장, 일어나시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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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한국의 경제발전 중에서 또 하나 경이로운 것이 해운업이다. DWT(deadweight tonnage·적재 가능 총중량)로 따져서 한국은 세계 5위다. 그리스·일본·독일·중국 다음이고 한국 뒤로는 노르웨이·홍콩·미국·덴마크·영국이다. 전통적인 해양강국 미국·영국과 바이킹(Viking)의 후예 노르웨이가 모두 한국보다 못하다.

 2008년엔 배로 화물을 실어 날라 번 돈이 수출 품목 중에서 1위를 차지했다. 470억 달러로 조선(431억)·석유제품(376억)·자동차(350억)·반도체(328억)보다 많았던 것이다. 제조업이 아니라 서비스업이 수출 1위를 기록한 것은 처음이다. 많은 국민은 자동차나 TV·반도체·휴대전화만 기억하지 해운업이 이처럼 막강한지는 잘 모르고 있다.

 한국 해운업의 성장 비결은 운명과 정책이 적절히 합쳐졌기 때문이다. 생존과 산업발전을 위해 한국은 태생적으로 원유·철광석·연료탄 같은 원자재를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수출에 국가의 명운을 걸었다. 한국은 원자재는 들여오고 제품은 열심히 실어보내야 했다. 이 숙명적인 일을 외국 배에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한국은 살기 위해 배를 띄워야만 했던 것이다.

 해운업에서는 핵심적인 존재가 선원이다. 해방과 건국 이후 해양대학을 비롯한 선원 양성소에서 뱃사람들이 나왔다. 그런데 그들이 탈 배가 한국에는 별로 없었다. 선원들은 닥치는 대로 외국 배를 탔다. 그들은 태양에 그을리고 바닷바람에 건조됐다. 그렇게 성장한 한국인 마도로스(matroos·네덜란드어로 선원)들이 조국의 배를 몰기 시작했다. 그들이 항해사가 되고 선장이 되어 오대양을 누볐다. 대표적인 마도로스가 삼호주얼리 호의 석해균 선장이다.

 석 선장은 뱃사람 중에서도 전형적인 자수성가(自手成家) 형이다. 실업고를 나온 후 돈이 없어 해양대학에 가지 못하고 해군부사관이 됐다. 제대 후에 그는 맨바닥 갑판원부터 시작했다. 그러고는 3등·2등·1등 항해사를 거쳐 선장이 됐다. 군대로 치면 이등병으로 출발해 사단장이 된 것이다. 선장은 영어로 캡틴(captain)이다. 마도로스 사이에서 캡틴은 인생의 완성을 상징하는 영예로운 자리다. 배는 한 국가의 영토로 간주되기 때문에 캡틴은 고위급 민간 외교사절이기도 하다.

 오대양을 항해하는 배는 폭풍우 그리고 높은 파도와 싸워야 한다. 요즘엔 해적이란 위험도 있다. 배가 위기에 처하면 선장의 판단력과 지휘력이 매우 중요하다. 배와 선원의 생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석 선장은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격언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소말리아 해적이 배를 습격하자 선원 21명은 안전피난처로 대피했다. 안전피난처란 구조병력이 올 때까지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선원들은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해적들이 산소용접기와 소총으로 철제 자물쇠를 부순 것이다. 해적들이 작업하는 2~3시간 동안 선원들은 얼마나 공포에 떨었을까.

 해적의 총부리 앞에서도 선장은 기지(機智)와 용기를 잃지 않았다. “당신들이 급하게 엔진을 끄는 바람에 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거짓말로 시간을 끌었다. 해군 UDT대원들이 배를 공격하자 해적은 석 선장이 그들의 공적(公敵) 1호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를 찾아내 난사(亂射)했던 것이다.

 갑판을 닦던 청년에서 선장에 오른 석해균. 한국 해운업의 대표적인 마도로스 석해균. 그가 지금 생애 최대의 폭풍우와 싸우고 있다. 조국으로 돌아왔으니 새로운 기(氣)가 그의 몸으로 들어갈 것이다. 노부모·부인·자식의 기도를 모아, 모든 뱃사람의 외침을 담아, ‘선장이 살아야 작전이 끝난다’는 청해부대의 작전지침에 따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덴만 사건으로 새로운 의식을 깨우친 국민의 염원을 합쳐서… 명령합니다. “선장, 일어나시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