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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SNS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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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70년대 이란 팔레비 왕의 독재에는 물 샐 틈이 없어 보였다. 당시 이란의 TV 보급률은 70%, 라디오 보급률은 100%에 달했지만 국민이 듣고 볼 수 있는 것은 국왕을 칭송하는 용비어천가뿐이었다. 비밀경찰 사바크(SAVAK)는 반왕정 인사들을 철저하게 압박했고 최대의 위협인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64년 이라크로 추방돼 있었다.

 하지만 77년, 이란 정부가 맞닥뜨린 것은 예상외로 치열한 반정부 세력의 시위였다. 어떻게 이런 조직적인 저항이 가능했을까. 개혁 확산(diffusion of innovations) 연구로 잘 알려진 에버릿 로저스는 이란 혁명의 배후에 새로운 정보기술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호메이니는 14년간의 망명 생활 동안 거의 매일 녹음기 앞에서 설교했고, 이 설교는 당시로선 ‘싸고 가벼운 첨단 디바이스’인 수천 개의 카세트테이프에 복제돼 이란 국내로 반입됐다.

카세트 플레이어가 없는 지역에선 이슬람 사원을 중심으로 녹취록이 대량으로 복사·배포됐다. “타락한 국왕에 맞서 순교자가 되라”는 호메이니의 목소리는 이란의 성직자와 시민들을 한껏 고양시켰다. 70년대 들어 널리 보급된 복사기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79년 초 팔레비 왕은 국외로 축출됐고 호메이니는 민중의 환호 속에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란 국민들은 ‘제로크라시(xerocracy·복사기를 뜻하는 xerox와 democracy의 합성어)’의 승리를 자축했다.

 이란 혁명의 교훈은 2011년 벽두부터 불어닥치고 있는 아랍권 민주화 열풍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집트의 무바라크나 튀니지의 벤 알리, 예멘의 살레 대통령은 팔레비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이들은 수십 년간 탄탄한 권력을 누려 왔지만 미디어 환경의 변화 앞에 무력했다. 카세트테이프나 복사기가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로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이런 변화가 무색한 지역도 있다. 대표적 반SNS 국가인 중국은 ‘금순공정(金盾工程)’이라 불리는 국가적 인터넷 통제 시스템에 따라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다. 눈부신 경제 발전과 한껏 고양된 신중화주의도 정보 민주화 요구를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데 기여하는 모습이다. 과연 중국은 언제까지 SNS 열풍 앞에 무풍지대로 남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송원섭 JES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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