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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조 백일장] 1월 수상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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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깨를 볶다가 문득  - 김경숙

새 달력의 일월은 생깨처럼 비릿하다

자잘한 웃음소리

고소하게 깔리는 게

밑불이

어림해보는

하루하루 기대치

낯선 곳이 궁금할 땐 한 번씩 튀는 거다

쉼 없이 휘저어야

골고루 살이 차는

참깨를

볶는 순간도

눈 맞춤이 필요한 법

비린끼 걷힌 뒤 공손하게 담긴 것들

버릴 것 하나 없이

단 기름을 꽉 물었다

뭉근한

삼백예순다섯 날도

나를 깨울 밑불일까

◆장원약력

1971년 경남 고성 출생. 현재 부산 거주. 가정주부. 2008년부터 부산여성문화회관에서 시조 공부. 동인 모임 ‘문학사계’ 회원.

차상

가리봉동을 아십니까?  - 이선호

매캐한 황사 바람 헤쳐 나온 작은 멧새

성긴 숱 깃털 모아 아린 상처 다독이며

옥탑방 전등불 아래 촉 낮은 꿈 키운다.

이방의 질긴 하루 휠체어로 밀어내고

세 평짜리 대기실에 언 손 녹여 피우는 꽃

밤마다 옌벤(延邊) 하늘이 굴렁쇠로 굴러온다.

안으로 감겨오는 매듭 붉은 아픔들이

딱딱한 각질 속에 새살 돋아 피가 돌고

그 너른 세월 한 끝을 자박자박 밟고 간다.

신새벽이 숨을 쉬듯 제 몸을 붙들어 세운

가리봉동 끝자락의 오보록이 쌓인 봄눈

삼월의 햇살에 불려 잔설 스릇 녹고 있다.

차하

봄동  - 김순국

얼었다 녹았다가 몇 번을 치렀을까

때 아닌 겨울장마에 몸살을 앓더니만

오늘은 거친 손으로 아기별을 안았네

한 생애 고비고비 눈물진물 씻던 곳에

텃밭이랑 꽃대들이랑 신명나는 하루해 손길

할머니 이랑이랑에 나비들이 밝힌다

시간을 깨로 형상화, 참신한 상상력 톡톡

이달의 심사평

1월이다. 다시 시작이다. 올 1월은 유달리 눈이 많아 모든 것을 덮고 다시 시작하기에 딱 좋은 분위기다. 이 백일장에도 새롭게 시작하려는 예비시인들의 젊은 기운이 넘쳐나고 있다.

  올해 1월 장원은 김경숙씨가 차지했다. 보내온 작품이 모두 그랬지만 장원작 ‘깨를 볶다가 문득’은 완성도가 매우 높다. ‘새 달력의 일월은 생깨처럼 비릿하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삶을 대하는 진중한 태도를 잘 느끼게 한다. ‘밑불’은 이 시에서 큰 역할을 하는데 첫째 수에서는 ‘깨’를 볶는 화자 자신이다. 그러다 셋째 수에서는 화자가 ‘깨’가 되고 일 년이라는 시간들이 ‘깨’가 된 화자의 ‘밑불’이 되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치밀한 구성이다. 또 ‘낯선 곳이 궁금할 땐 한 번씩 튀는 거다’ 같은 참신한 이미지는 일상어로 구사하는 진술과 함께 눈길을 잡는다. 이쯤이면 수준급이다.

  차상의 ‘가리봉동을 아십니까?’는 화려한 도시 한편에 감춰져 있는 이 시대의 아픈 현장 한 군데를 들춰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1970년대 이후 공장 산업의 대표 동네이라고 할 수 있는 가리봉동에는 3D업종에 종사하는 조선족들이 많다. 생산직 근로자인 그들은 ‘매듭 붉은 아픔’들을 안고 ‘이방’에서 ‘너른 세상 한 끝을 자박자박 밟’으며 살아가고, 화자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언어를 다루는 힘이 좋아 현실의식을 잘 담았다. 하지만 마지막 수에 있는 ‘오보록이 쌓인 봄눈’과 ‘스릇 녹고 있’는 ‘잔설’과의 관계를 애매하게 설정해 놓아 명쾌한 마무리를 못 짓고 있다. 시조는 잘 던지고, 잘 풀고, 잘 맺어야만 한다.

  차하 ‘봄동’은 시적 긴장감은 다소 없지만 시조 가락을 잘 살렸다. 길어져 흠이 될 수 있는 둘째 수 중장도 별 무리 없이 읽힌다. 안정된 음보 덕이다. 긴 습작 기간이 있었으리라 짐작 된다. 하지만 시조는 정형시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긴장감 없는 느슨한 시는 눈길을 끌기 힘들다는 것도.

  서해경·이흥열·이상목(캐나다)씨의 작품은 아쉽게 내려놓는다. 특히 서해경씨의 ‘이상, 현실을 읽다’는 끝까지 들고 있었다는 것을 밝힌다.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오승철·강현덕(집필 강현덕)

 ◆응모안내=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해 그 달 말 발표합니다. 늦게 도착한 원고는 다음 달에 심사합니다. 응모 편수는 제한이 없습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겐 중앙시조백일장 연말장원전 응모 자격을 줍니다. 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 (우편번호 10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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