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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현모양처·신사임당·현대의 한국 주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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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파주 자운서원의 신사임당과 이원수 합장묘. 묘역의 제일 위에는 율곡 부인 묘가 있고 그 아래 차례로 율곡, 율곡의 형 부부, 율곡 부모 합장묘, 율곡 맏아들 묘가 있다. 옆에는 율곡의 매형, 생질, 사돈 묘도 있다. 자식이 부모 위에, 아내가 남편 위에 서지 못하는 원칙과 문중 묘역에 이성(異姓)을 들이지 않는 관행에 모두 어긋난다. 신사임당 시대에는 현모양처는커녕 삼종지도도 아직 일반화하지 않았다. [사진=문화재청]

우리나라 최고액권 화폐에 초상을 올린 사람은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 중 유일한 여성이며 유일하게 ‘이씨가 아닌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씨’의 며느리, 아내, 어머니였다. 그가 한국에서 가장 비싼 ‘얼굴’이 된 것도 탁월한 예술가라서가 아니라 세종대왕 바로 아래 자리를 차지할 만큼 추앙받는 아들을 둔 덕이다. 그는 ‘신사임당’이다.

 5만원권 화폐에 들어갈 인물로 신사임당이 유력하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어떤 여성단체는 “신사임당은 유교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이상적 여성의 전형으로 자기 자신이기보다는 이율곡의 어머니요, 이원수의 아내로서 인정받고 있다”며 “‘어머니, 아내만이 보편적 여성상으로 자리 잡는 것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현모양처는 유교적 여성상의 전형이 아니었으며, 설령 그렇다 해도 신사임당은 그 기준에 맞지 않았다.

 유교가 여성에게 가르친 기본 덕목은 ‘삼종지도(三從之道)’였다. 어려서는 아버지에게,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늙어서는 자식에게 순종하는 것이 여성이 평생 지켜야 할 도리라는 뜻이다. 순종(順從)은 자아(自我)를 용납하지 않으며 사유(思惟)를 배격한다.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자질은 ‘말 잘 듣는 것’뿐이다. 그에 비해 현모양처는 여성이 도달해야 할 지향점과 길러야 할 자질을 제시하며 남편과 자식을 보조하는 형식으로나마 여성에게 자율과 능동의 영역을 허용한다.

 현모양처론은 유교의 덕목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창안돼 20세기 초 한국에 유입된 천황제 국민국가의 여성관이다. 천황제 국민국가가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은 남성이 나라에만 충성할 수 있도록 뒤에서 가정을 맡아 꾸리며 자식을 충성스러운 미래의 신민(臣民)으로 기르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현모양처 양성을 목표로 내건 여학교는 1906년에 설립된 양규의숙(養閨義塾)이다. 이후 최근까지 여성의 자아실현은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라는 담론이 대다수 한국 여성들의 의식을 지배했다.

 신사임당은 결혼 후 20년 동안 주로 친정에서 살며 시집은 돌보지 않았다. 4남3녀를 낳았지만 율곡 이이 말고 특별히 잘된 자식도 없었고 남편을 크게 출세시키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는 평생 ‘자기 자신’을 위해 그림 그리는 데 열중했다.

 현모양처의 대표는 신사임당이 아니라 현대의 표준적인 한국 주부들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그들은 남편을 출세시키고 자식을 좋은 학교에 진학시키는 데 인생 전부를 걸었다. 그러나 근래 자기만의 공간을 찾고 확장하는 여성이 늘고 있으니, 머지않아 신사임당도 제 산 모습대로 인정받는 날이 올 터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