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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56)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1

여린과 애기보살이 주지스님으로부터 정식으로 계(戒)를 받았다.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그녀를 데리고 온 바로 그날 저녁이었다. 이사장은 때로 종교의 허례적인 형식을 강력하게 부정하면서도 때로 구성원들에게 그 형식을 장엄하게 구현시켰다. 사람들이 갖고 있는 허상을 깨뜨려주는 척하면서 더 강력하게 허상을 심어주는 놀라운 방법이었다. 예컨대, 애기보살을 제단에 세우고 ‘이 아이는 관음의 현현이 아니오!’라고 선언, 사람들이 지닌 허상을 극적으로 깨뜨려주어 자신의 이념과 이미지를 사실성 있게 강화한 후에, 직접 나서지 않는 은근하고 점진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이미지와 소문을 만들어내어, 알고 보면 애기보살이 진짜 ‘관음의 현현’이라 오히려 굳게 믿도록 만드는 수법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개 애기보살을 감성적으로는 관음의 현현이라 믿으면서, 동시에 이성적으로는 관음의 현현이라 믿는 자신을 우매하다고 끝없이 자책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사장의 심리적 전술을 알아차렸다.
정말 본능적이었다. 그 무렵 나의 독서수준은 날로 더 깊어졌고, 아울러 직관과 감수성도 최고조에 이르렀다. 나의 내면은 물론이고, 사람들의 뼈와 창자와 피돌기가 하는 미세한 말들도 들리는 기분을 수시로 느꼈다. 신비하고 경이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말굽’이 나에게 가져온 선물인지도 몰랐다. 여린과 애기보살이 주지스님 앞에서 삼귀의(三歸依)를 하고 사홍서원(四弘誓願)을 했듯이 나는 나의 ‘말굽’에게 삼귀의를 하고 사홍서원을 해야 할 판이었다. 좀더 과장하건대, 그 무렵의 나는 모든 사람과 사물의 본질을 한눈에 꿰뚫어 알았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가령 백주사가 이사장의 부름을 받고 명안전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멀리서 보게 될 때, 그가 컨디션이 좋은지 나쁜지, 이사장에게 칭찬 받으러 가는지 질책 받으러 가는지, 심지어 이사장이 좋은 일이 있어 그를 불렀는지 화가 나서 그를 불렀는지를 ‘본능적으로’ 단번에 알아차릴 정도였다. 백여 미터가 훨씬 더 되는 거리라서 그의 표정을 세세히 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걸음걸이의 ‘본질’을 순식간에 알아차리고 마는 것을, 본능적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사람들을 무명(無明) 속에 가두는 게 이사장의 목표였다.
길을 가리켜 보여주며 길을 가리는 방식이었다. 이성과 감성을 끝없이 찢어발겨놓으면 사람들은 고통스런 자기 분열의 어둠 속에 놓이기 마련이었다. 여린과 애기보살에게 계를 주도록 한 것도 그런 전술에 필요한 소품을 하나 더 늘리려는 프로그램 중에 포함돼 있을 것이었다. 이사장은 정작 그녀들이 계를 받는 자리에 나오지 않았다. 논리의 모순을 모면하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둔 셈이었다. 나 또한 그 광경을 아쉽게도 보지 못했다.

두 사람 다 삭발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계를 받음에 있어, 머리를 깎고 안 깎고는 본래 정해진 규칙이 없다고, 백주사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삼보(三寶)에 귀의하고 오계(五戒)를 받고 사홍서원을 했으며 연비(燃臂)까지 마쳤다는 것도 말로만 들었다. 삼귀의는 “모든 것을 구족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가 그 첫째이고 “일체의 탐욕을 벗어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가 그 둘째이며 “모든 무리 중에서도 존귀한 승단에 귀의합니다.”가 그 셋째였다. 오계(五戒)를 받는다는 것은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사음(佛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의 계율을 지킨다는 것이고, 사홍서원은 모든 보살이 견뎌내야 할 네 개의 맹세를 바치는 의식이었다.

“사홍서원의 첫 번째 원(願)은…….”
백주사가 자상하게 설명해주었다.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깨달음의 피안에 도달하겠다는 것이고, 둘째 원은 사람으로서의 번뇌를 끊겠다는 것, 셋째 원은 부처의 가르침을 배워 깨닫겠다는 것, 넷째 원은 불도를 이루어 성불하겠다는 것일세. 말한다고 자네가 뭐 알아듣겠나마는, 주지스님이 중요한 건 선근(善根)이라 했으니, 관음보살님, 세지보살님, 틀림없이 성불할 것이네.”
선근이라는 말에서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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