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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남방정책 대 북방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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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북한이 ‘새로운’ 남방정책에 시동을 거는 모습이다. 남북대화는 물론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부쩍 열을 올리고 있다. 대미(對美) 일변도로 치닫던 남방정책의 좌절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일본의 한 언론인은 대미 일변도의 북한외교를 가마우지 외교로 표현한 바 있다. 가마우지란 물고기를 잡을 때 낚시 대신 이용하는 새의 이름이다. 낚시를 이용하면 물고기를 한 마리씩밖에 낚아 올리지 못하지만 가마우지를 이용하면 줄줄이 낚아 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 구이린에 가면 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줄줄이 낚아 올리듯, 미국만 이용하면 남한과 일본은 줄줄이 딸려 올 것으로 보았다. 1993년 핵 위기 이후 오늘까지 북한의 남방정책은 이러한 대미 일변도의 가마우지 외교에 매달려 있었다.

 핵위기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북한의 남방정책은 남한과 일본을 미끼로 미국을 낚으려는 낚시외교였다. 우리의 북방정책이 성공을 거두자 북한이 택한 정책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를 체결하고 팀스피리트 훈련을 중단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 또 핵위기의 막간을 이용해 6·15 공동선언과 북·일 평양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계속된 핵위기는 이런 낚시외교를 작동불능 상태에 빠뜨렸다. 그러자 핵카드로 미국에 올인하는 가마우지 외교를 가동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북한이 이런 가마우지 외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신년 공동사설에서 대결상태 해소, 대화와 협력사업을 강조한 데 이어, 정부·정당·단체의 성명과 조평통 담화를 통해 남북 당국 사이의 무조건적인 회담을 연일 제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계관 외무성 제1차관이 지난달 평양을 방문한 뉴멕시코 주지사 리처드슨 일행에게 말한 ‘포괄적인 세계전략’과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을 줄이고 대신 남한과 일본을 공략하는 1990년대 초 김일성의 남방정책을 모델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김일성의 유훈외교 부활은 김정은 후계체제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의 등장은 그 용모나 수법에서 할아버지 김일성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다. 우선 항일전에서 보여준 할아버지의 카리스마 같은 것을 연출하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연평도 포격으로 극적인 효과를 거두었다. 무릇 정치지도자는 호랑이를 사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북한판 테스트이기도 하다. 아버지 김정일이 KAL기 폭파를 통해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았듯이, 김정은도 연평도 포격을 통해 이런 자질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연평도 포격으로 남한의 정치지도자들이 호랑이를 쏘기는커녕 자신들의 발등을 쏘아대며 허둥대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군부를 장악하는 데 자신이 붙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예상된 그 다음 수순은 대화공세다. 그것도 할아버지를 모델로 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남북대화를 이용해 북·미, 북·일 관계를 풀려 했던 1990년대 초 할아버지의 남방정책이다. 왜 긴장 직후에 이런 절박한 대화공세를 펴는지 의아스럽다. 북한의 진정성을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진정성도 없이 대화에 임하는 행위를 되풀이해 온 북한이 아닌가. 그래서 정부가 시간을 두고 수용 여부를 결정하기로 한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대화테이블에 앉아 김정은 후계체제가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리처드슨 일행에 따르면 강성대국의 의미가 외무성과 군부, 그리고 최고인민회의에서 각각 다르게 통역되고 있는 모양이다. 무력적인 강함을 강조하는 군부에 반해, 외무성은 강하고 번성한다는 뜻으로, 최고인민회의는 번성과 번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2012년의 의미를 둘러싸고 당·정·군 간에 일고 있는 복잡한 속사정의 방증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사정을 봉합해 후계체제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아마도 할아버지의 유훈뿐일지도 모른다.

 이게 사실이라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의 복원을 우리 정부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이 서울에 올인하듯 우리도 평양에 올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우리의 북방정책 패러다임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북한이 쏟아내고 있는 대화공세가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날지 예의 주시해야 할 시점이다.

장달중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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